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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Aug 20. 2023

삭발을 했고 이유는 없습니다

삭발한 여자의 요모조모

삭발을 했다. 이유는 없다. 긴 머리가 좋아서 더운 여름철에도 긴 머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분위기를 조금 바꿔볼까 싶어 단발을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도 삭발을 했다. 내게 삭발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머리 모양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삭발한 머리를 유지한 지는 이제 반 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 삭발할 때만 미용실에 가서 했고, 그 뒤로는 바리깡을 사서 집에서 직접 밀고 있다. 미용사는 머리를 밀기 전에 몇 번이나 물었다. 정말로 후회 안 하시겠어요? 나는 상관없으니 빨리 밀어달라고 했다. 긴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감각은 새롭고 재미있었다.


다 밀고 난 머리를 보더니 미용사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여자 분이 이런 머리 어울리시기 쉽지 않은데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하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용사는 물었다. 그런데 여자 분이 왜 삭발하실 생각을 했어요? 연달아 나오는 '여자 분'이라는 말이 거슬려서 그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골 국밥집 사장님은 시원하게 밀어버린 머리를 보더니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머리가 다 어디로 갔어! 나를 향해 건넨 첫 인사는 이랬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삭발한 머리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삭발에 대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기 마련인지라, 여성의 삭발은 더 큰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된다. 하지만 나는 늘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밀었어요. 덥고, 불편해서. 그렇게 말하면 납득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랑에 배신당하지도 않았고 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지도 않다. 사회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 흠, 이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옹졸한 불만이 삭발의 이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내 삭발에는 정말 이유가 없었다.


삭발을 하고 나서 깨달은 것은 한국 사회가 생각보다 보수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삭발을 하고 안경을 쓰고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로 손쉽게 취업에 성공했다. 내 머리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물어보지 않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그러나 삭발을 한 뒤 또 하나 확인한 사실은 역시 한국 사회는 보수적이라는 것이었다. 머리를 밀었다는 이유로 '페미'냐며 길에서 시비를 거는 젊은 남성들이 종종 있었다. 내가 실제로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 간에, 내 정체성을 섣불리 판단하고 단정짓는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한편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삭발을 한 뒤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약간 불편해졌다. 내 뒷모습만 보고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볼일이 너무 급해서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뒤에서 '여기 여자화장실이에요!'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여성들에게는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 일임을 알기에, 이제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여자입니다 기침'을 하면서 들어간다. '여자입니다 기침'은 내가 낼 수 있는 한 가장 여성스러운 톤으로 가볍게 기침을 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화장실에서의 오해는 어느 정도 예방이 된다.


삭발한 머리는 확실히 선입견을 잘 불러일으킨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신경을 써야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불편한 부분도 있다. 그래도 머리를 길러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도 삭발을 고수할 것 같다. 일단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 머리를 감고 나서 말릴 필요가 없다. 수건으로 몇 번 닦아주기만 하면 두피까지 금세 뽀송뽀송해진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에는 꼭 샴푸를 하지 않더라도 물만으로 두피를 시원하게 씻어줄 수 있어서 좋다.


두 번째 이유, 자고 일어난 뒤 망가진 머리 모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심한 반곱슬 머리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나에게 이건 정말 큰 장점이다. 머리카락이 눌리지도, 이리저리 뻗치지도 않는다.


세 번째 이유, 집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니 미용실에 갈 필요가 없다. 그만큼 돈이 굳는다. 요즘 미용실 가격은 또 얼마나 비싼지!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 머리 모양을 내가 직접 관리한다는 것은 은근한 자기효능감을 준다.


마지막 이유, 편하다. 그냥 편하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친구가 우리 집에서 샤워를 하고 간 날이 있었다. 샤워를 다 하고 나더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네가 머리카락이 진짜 없기는 하구나. 어떻게 된 게 집에 린스도 없고, 빗도 없어……."


삭발을 한 뒤 많은 것들이 불필요해졌다. 편안하고 가볍고 홀가분한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든다. 머리를 감고 곧바로 베개 위에 벌러덩 누워버릴 수 있는. 주위 여성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삭발을 권하고 있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석연찮다.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못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 적도 있다. 그게 뭐람.


인기 있는 여자 연예인이 멋지게 삭발을 해서 여자들 사이에 삭발 유행이 한 번쯤 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삭발의 좋은 점을 나만 알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나만의 개성(?)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다.


어쨌든 나는 한동안 삭발한 채로 지낼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더라도,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삭발한 머리가 주는 편안함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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