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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에스더 Jul 28. 2022

아이가 불평하는 말을 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완벽하게 좋은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나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엄마가 6시 넘으면 못 한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6시까지 들어오면 할 수 있다는 게 그 말이지. 4분은 6시가 넘은 거야? 안 넘은 거야?”

  “넘은 거죠.”

  “그럼 늦은 거니까 오늘은 게임 못하는 거야.”

 "엄마가 못하는 거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없긴 뭐가 없어. 6시 넘어서 들어오면 못한다는 게 그 말이지."


 나와 아이는 같은 말만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 4분 늦은 걸로 게임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아이의 외침이었다. 나는 무한 반복하는 대화에서 폭발했다. 결국 강한 여왕벌이 되어 애한테 독침을 쏘아붙였다.




 “너 자꾸 이렇게 억지 부리면 내일도 하지 마.!!!!!
주말 동안에 게임 금지야!!!!”

 



아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오열했다. 크게 울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불평했다.




 “나는 운이 없어.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지? 게임도 못 하고. 6시 까지 오려고 최선을 다한 건데. 엄마는 알아주지도 않고. 왜 못한다고만 하는건데...”



 나는 아이에게 시간을 지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거였는데, 아이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아이가 절망스러워하는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다음 말에 한 아이의 말을 듣고 난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이에게 분노의 화산을 터뜨렸다.     

 



 “엄마는 왜 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해요.”




 “내가 언제 그랬어?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너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한 거였잖아!!!!”

 










 나는 아이를 잘 이해하고 품어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아이 편에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하는 말을 해주려고 애썼다. 많은 육아서를 읽었기에, 아이의 감정을 어떻게 받아줘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쌓여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적용하는 건 어려웠다. 감정은 받아주되 행동에서 제한한다는 게 힘들었다. 특히 첫째 아이가 불평하는 말을 할 때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컸다. 친정엄마는 내가 불만스럽게 말하면 오히려 나에게 격하게 화를 냈다. 내 인격을 함부로 말할 때도 많았다.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 작은 것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친정엄마가 인격을 함부로 말할 때 정말 싫었다. 나는 엄마와는 다르게 아이의 인격은 건드리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기에 내가 듣지 못했던 온전히 이해해주는 따스한 말을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이성을 덮어버린 화난 감정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상태에서는 소용없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분노한 상태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친정엄마의 모습이 내 몸 세포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바로 튀어나왔다. 타올랐던 불이 꺼지면 자책 모드에 심하게 빠졌다. 내가 한 말로 아이가 상처받을 게 걱정했다. 



사실은 아이가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워한 거였다. 



내가 친정엄마를 느꼈던 것처럼 아이도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는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친정엄마와 다른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되면 아이가 나를 좋아해 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와 다르게 행동하고싶었던 것이었다.







 “엄마가 주말까지 게임 금지라고 과하게 말해서 미안해. 니 말에 화가 나서 그랬어. 너가 애쓴 것을 알아주지 않아서 그랬듯이, 너가 엄마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랬어.”


 나는 마음을 차츰 가라앉히고 아이에게 내가 느낀 부분을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는 그 말에 엉엉 울면서 나에게 안겼다. 금세 “엄마 저도 죄송해요.” 울면서 사과했다. 나는 그 말에 같이 울었다. 아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내가 완벽하게 좋은 엄마여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거였다. 엄마의 어떤 모습이 자신의 기준이 맞아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때 아이는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친정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조건 없는 사랑을 아이가 나에게 해주고 있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내 부족한 행동을 수용해주었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단 인정하고 나면 노력으로 그것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릴 때는 친정엄마에게,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동료들에게, 그리고 남편과 아이에게까지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랑받으려고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외면하고 억누르려고 했다. 


 제대로 착각한 거였다.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너무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썼던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관계를 방해했다. 그럴수록 나보다는 타인의 반응에 맞추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자 끝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모난 부분도 수용한다. 거기에서 진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고 하나씩 고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바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나 자신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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