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산 Apr 27. 2020

출근길에 사랑을 만나다


일주일에 한두 번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전날 술을 마셔 차를 두고 오거나 당일 술 약속이 있어 아예 차를 두고 출근하는 날이다.  통근 버스는 집 앞 도로 건너편에 일곱 시 십오 분에 정차한다. 그 시간 횡단보도는 출근하는 사람과 학생들로 늘 붐빈다. 이쪽 사람들은 저쪽으로 저쪽 사람들은 이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횡단보도에서 자주 보게 되는 여자가 한 명 있다. 처음 그녀를 본 건 작년 가을이었다. 균형 잡힌 몸매의 짧은 단발머리 여자는 길 건너 멀리서 봐도 햇살만큼 돋보인다. 그녀의 나이를 서른 즈음으로 짐작케 한다. 수려한 외모에 비해 그녀의 옷차림은 수수하다. 연한 나팔 청바지와 밑창이 얇은 스니커즈는 싱그러운 젊음 그 자체다.  
 
그러나 그녀를 눈에 띄게 하는 것은 돋보이는 외모도 싱그러운 젊음도 아니다. 그녀는 늘 족히 예닐곱은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업고 있는 것이다. 등에 업힌 사내아이는 작은 배낭을 메고 가늘고 길쭉한 다리를 그녀의 팔 사이로 쭉 내뻗어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요즘은 참 보기 드문 광경이다. '제법 큰 몸집의 사내아이를 업고 있는 젊은 여자라. 동생일까? 조카일까? 설마 아들인가?' 머릿속으로 여러 추측을 하는 순간 '엄마!....'라고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장애가 있어 엄마가 업고 가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통근버스를 기다리며 반대쪽 두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아이는 그녀 손을 잡고 경쾌하게 걷고 있다. 장애는 없는 듯하다. 도로를 따라 두 사람이 걷는 방향으로 백여 미터 앞에 유치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모전자 회사 통근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꽤 긴 줄을 서있다. 어느새 그녀는 그 줄의 맨 끄트머리에 서있다.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을 하는 워킹맘이다.   
 
두 모자를 볼 때마다 같은 광경이다. 어떤 이유로 아이를 업고 가는 걸까? 유치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얼러서 보내기 위해서일까. 촉박한 출근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예 업는 게 빠르다고 판단했을까. 워킹맘으로서 아이에게 못해주는 미안함을 표시하는 걸까. 어려서부터 독립심이 부족한 응석받이로 키우는 잘못된 훈육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두 모자의 생소한 모습은 나에게 편안하고 훈훈한 광경으로 다가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엄마 등 신세를 진적 있다. 처음 업혀 학교를 갈 때는 친구들 눈초리에 창피했다. 시골서 흔치 않은 깁스만이 나의 붉어진 얼굴을 변호해 주었다. 며칠 지나자 엄마의 넓은 등과 냄새가 너무 좋아졌다. 엄마의 걸음 리듬과 내음을 느끼며 온전한 행복감에 빠졌다. 엄마와의 그 느낌은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마음속 한 구석에 오롯이 간직되어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자식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일 것이다. 좋은 교육 환경과 올바른 지도, 재정적 지원, 사회에 잘 융합하는 예절과 관습...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본인이 할 수 있는(Can do) 사랑의 크기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그릇은 많은 부분 부모로부터 받은 만큼 결정된다. 안타깝지만 사랑은 받은 만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넘는 사랑은 줄 수 없는 것 같다. 작고 빈 그릇에서 무엇을 퍼내겠는가.
 
본인이 알건 모르건 아침에 만나는 그 젊은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폭풍우에도 꺼지지 않은 마음속에 빠알간 사랑이라는 불씨를 차곡차곡 쌓고 있다고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