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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Jun 23. 2022

누나에 대한 짧은 기억


나는 이제 누나가 없다.

누나가 죽었다.


"아프지 마" 누나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한 말이다.

어두워지는 창밖에 눈이 펑펑 내렸다.

며칠 후 누나를 다시 보러 갔다. 금요일이었다. 누나는 의식이 없었다.

가끔씩 힘겹게 눈을 떴지만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날도 눈이 펑펑 내렸다.

"월요일에 보자" 내가 누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당연히 다시 볼 것 같았고, 그러길 바랐다.

두렵고 불안해지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화가 왔다. 

누나가 죽었다.


기차에서 내렸다. 장례식장이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가 가득했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카메라를 켰다. 

화면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빠르게 쏟아졌다.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누나는 도자기 안에 뽀얀 가루가 되어 담겼다. 납골묘는 전망이 좋은 시립 묘지였다. 

유골함은 따뜻했다. 가슴이 비틀거렸다. 울음이 나왔다. 울음은 곳곳이 잘려 나간채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쓰러졌다. 울음이 아닌 한탄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영글지 못한 슬픔을 조각조각 베어 버렸다. 


..

삼우제를 지냈다. 

법당에서 계속 절을 했다. 

추워서 그랬다.


..

49제를 지냈다. 추웠다. 

시린 무릎을 손으로 감싸고 금강경 책장을 넘겼다.

금강경은 길었고, 누나의 삶은 짧았다. 


..

누나에 대한 기억을 해 보았다.

희미한 장면들 몇 개만 간신히 기억해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누나는 내게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맥락 없이 끊어진 짧은 기억들과 함께...






기억 하나.

누나는 나보다 세 살 많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로 가는 큰 길가의 언덕배기에 소나무 여러 그루가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누나와 나는 보이지 않게 몰래 엎드려 학교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바람이 솔잎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한 나절을 그렇게 숨어있다가 아이들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2학년 때 읍내로 이사를 갔다. 공무원 주택이라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거실을 중심으로 방 두 개와 부엌이 둘러있었다. 집 한쪽으로 월세를 준 부엌 딸린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자의 직업은 교도관이었고 그들은 온순한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가끔 아버지와 엄마의 싸움을 말리려 애를 쓰곤 했다. 그곳에서 2년 정도의 시간은 아버지의 외도와 어머니의 독기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냈고 모두에게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시기의 기억에 누나가 없다. 누나는 물론 세 살 어린 동생의 기억도 전혀 없다. 

분명 함께 살았지만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누나와 동생에 대한 존재의 기억이 없다. 그냥 당연히 함께 살았다고 믿고 있었다. 근거 없는 믿음은 다른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의심했지만, 누구도 내게 당시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착각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듯 기억이 사라진 것도 나의 필요에 의한 착각일 것이다. 


당시 내게 아버지는 낯설었고 엄마는 두려웠다. 두 사람의 싸움은 격렬했고 그 상황에서 가족 모두는 자신만을 보호하기에도 힘겨웠었다. 서로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그것에 모든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공감이나 위로도 스스로 해주어야 했다. 차곡차곡 쌓인 상처는 하나씩 자기 연민으로 변해갔다. 나는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갔다. 자폐적 세계 구성은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자기 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누나는 기억할까. 그때의 나에 대한 것들을... 그리고 왜 나는 누나에게 묻지 않았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누나에 대한 것들을.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집에 새엄마와 함께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두 번째 부인과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셨다. 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인 친할머니는 십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큰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집은 붉은 함석지붕에 연노랑 페인트가 칠해진 낮은 담벼락을 커다란 주황색 나무 대문이 붙들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수수꽃다리가 있었고 봄이면 야시시한 향기가 벌들을 불러들였다. 그 옆으로는 수돗물과 말라버린 펌프가 있었는데 한 여름에 마중물을 넣고 한참을 퍼거덕거리면 차거운 지하수가 쏟아져 나왔다. 샘을 중심으로 넓은 마당이 자리했고 'ㅁ'자 형태로 마당을 둘러싸며 방들이 여섯 개나 있었다. 예전에 군수인가 읍장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전에 살던 사람의 부나 지위와 권한을 내가 함께 물려받은 것처럼 으쓱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부자였다.


새엄마라는 존재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안에서 난폭한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 역시 얼마 가지는 않았다. 가끔 누군가 엄마의 소식을 묻거나 학교에서 부모의 이름을 적어 내야 할 때는 어떤 엄마를 말하는 것인지 무척 혼란스러웠고 창피했다. 그것 말고는 지낼만했다. 할머니나 고모를 비롯한 친척들은 나를 무척 가엾게 여기며 아껴주었다. 그들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좋든 싫든 나와 누나는 엄마를 증오하는 말들을 했다. 내게 엄마는 독하고 무서운 사람일 뿐이었다. 


할아버지 집에서 지낸 십 년 동안에는 몇 가지 누나에 대한 기억이 있다. 기억이란 더럽혀지기보다는 보기 좋게 채색되기 쉬우며 그것이 사람에게는 이롭다. 그 시절 누나에 대한 기억들이 내게는 가장 순수한 빛깔로 채색되어 나타난다. 중학생이던 누나는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다. 햇볕이 반가울 정도의 날씨였다. 두 명의 형들이 누나를 찾아왔다. 검정색 동복을 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형이 내게 누나를 불러 달라며 부탁을 했다. 같이 온 친구는 어물쩡 몇 걸음 떨어져 있었다. 키 큰 형이 혼자 오기가 어색해 데리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불쾌했다. 경계심을 보이며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내게 과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과자 하나를 더 살 수 있는 돈도 함께 주었다. 기름이 묻어나는 바삭한 과자와 그 과자를 살 수 있는 돈은 경계심을 쉽게 잠재워버렸다. 

시간이 지나 키 큰 형이 혼자서 오기 시작했다. 형은 늘 누나를 기다리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있는 굴뚝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말을 할 때면 손가락을 꺾으며 오독독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 형을 보면 내 입에는 침이 고였다. 어쩌다 생각에 잠겨 형이 나를 보지 못했을 때는 일부러 신발을 끌어 소리를 내기도 했다. 누나가 밖으로 나와 형을 만나기 전에 내가 부탁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야 상점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형의 방문이 뜸해졌을 때는 몇 번씩 대문 밖으로 나와 기웃거리기도 했다. 연노랑 담벼락에 오후의 볕이 들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내 입술에 빤지르르 기름칠을 해 준 그 형을 나는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누나는 내게 대단한 존재였다.


어느 날 누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가 누나를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 맘은 다시 불안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마와 누나에 대한 알 수 없는 원망이 집안을 떠돌았고 나는 그 기운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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