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Time flies like an arrow’라는 표현이 있다. 시간이 화살과 같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이다. 100세 시대 아직 반도 살지 않았지만 인생 참..하룻밤의 꿈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려우면 어려운 데로 기쁘면 기쁜 데로 내 뜻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나는 지금도 돈보다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이야 언제든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내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절반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서인지 시간에 더 집착하며 살았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마치 날려버린 20년이라는 내 인생에 사죄나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독하게 살았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 또한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행복한 삶을 살라고 하지만 행복이란 또 무엇일까? 많은 경험을 쌓는 것? 즐거운 일을 찾아 하는 것? 타인을 애틋하게 여기고 도우며 살아가는 것? 내 가족과 잘 먹고 살사는 것?
행복에 대한 정답을 찾기 어려우니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철학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요즈음 나의 끝없는 질주를 보며 질문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인지 이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해본다. 무엇때문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있냐고.. 그래서 나도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졌다. 일단 확실한 것은 성공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 하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가난은 불행한 것이지 불편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많은 돈을 벌어서 더 좋은 위치에, 더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이 크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직장생활 외에도 개인적으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책도 쓰고,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논문도 쓰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고, 또 다른 자격증 취득을 위해 교육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묻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하느냐고.. 누차 얘기하지만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날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성공과 돈이 아니라면 나를 몰아세우면서까지 새로운 일을 벌리고 또 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두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늦은 출발로 인해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흔히들 ‘행운 총량 법칙’이 있다고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어진 행운의 총량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솔직히 고백하면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그동안 유독 불행이 나에게 집중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공부 총량 법칙’, ‘일의 총량 법칙’ 등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학창시절 죽어라 공부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성인이 되어서 덜 공부하게 되며, 학창시절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덜 공부하게 된다는 의미는 효율적인 학습 방법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며, 또 추가적인 학습에 필요한 기본 원리를 이미 습득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총량의 법칙을 나에게 적용하면 나의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한 평생을 살면서 그 나이대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해야 하고, 20대에는 세상에 한 발 더 나와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연애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30대에는 업무에 몰두해서 성과를 내고 승진을 경험한다면 40대에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50대에는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절차데로 살았을 때 가장 안정적일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40대에 고등학생들이 수능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시간과 열정으로 공부에 매진하는 것이 옳을까? 40대에는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 확고하여 판단에 흔들림이 없다고 하던데, 40대에 10대에 이미 끝냈어야 할 과정들을 하고 있다면 가치관 확립은 도대체 언제나 가능한 것일까? 물론 공부를 하면서 가치관 정립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가치관이라는 것은 공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책을 읽고 경험을 쌓고 나를 돌아보는 반성과 명상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공부하느라 바쁜 40대에 가능한 일일까 싶다.
결국 헛되게 보냈던 20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현재 내가 바쁘다는 결론이다. 혹은 이유야 어찌 되었던 인생을 게을리 살았던 벌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생각해본 이유는 불안한 감정들의 차단이다. 제 2의 사춘기라고 하는 ‘40대 사춘기’가 나에게는 유독 혹독했다. 당장 회사에서 쫒겨난 것도 아니고 회사에 불안 요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당장 회사에서 쫒겨 난다면(이미 두번의 경험으로 나는 언제든 내가 또다시 쫒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안고 살아왔다) 당장 밥벌이를 위한 재취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실제로 이직을 위해 수십 군데 지원을 하였지만 성공 확률이 매우 낮았다(성공한 곳은 대부분 눈높이를 많이 낮춰 지원했던 중소기업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나를 무엇인가 하도록 강요했다. 빠른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실직 상태를 대비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위를 취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더니 급기야 숨쉴 여유조차 주지 않고 나를 더욱더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달리는 경주마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던 것이다. 나의 깊은 내면에서 답을 찾기까지 나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을 수십 번, 수백번을 거쳤다. 찾아낸 답이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다.
불안감은 내 삶을 갉아먹기도 하지만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 많은 것들을 이뤄냈으니 말이다. 결국 어려서는 사람들의 상처 되는 말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더니 성인이 되어서는 불암감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리사 펠드먼 배럿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에서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낸다. 우리는 감정을 인식 또는 확인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낸다. 우리는 여러 체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즉석에서 우리의 자신의 감정 경험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한다.
인간은 고도로 진화한 뇌의 동물적인 부분에 깊숙히 파묻혀 있는
가공의 감정 회로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다.
결국 감정이라는 것도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나온 과거,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감정이라는 것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도,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감정이면서도 바로 나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은 통제의 대상일까? 감정 자체가 나인데 어떻게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작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였다.
감성지능은 개념의 관점에서 더 잘 규정될 수 있다. 당신이 아는 감정 개념이라곤 ‘기분이 아주 좋다’와 ‘기분이 더럽다’라는 두 개 밖에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감정을 경험할 때마다 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각할 때마다 오로지 이 거친 붓으로 범주화를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감성지능이 높을 수 없다. 반면에 만약 당신이 ‘기분이 아주 좋다’의 의미를 …… 더 미세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그리고 …… ‘기분이 더럽다’의 50가지 뉘앙스를 안다면, 당신의 뇌는 예측과 범주화와 감정 지각의 훨씬 더 많은 옵션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더 유연하고 효과적인 대처를 위한 도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즉, 감정을 더 세분화하라는 것이다. 뭉뚱그려진 불안감을 잘게 쪼개야 효과적인 대처가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겠지.. 그럼 언젠가는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더라도 대응은 가능할 것이다. 그럼 또 언젠가는 감정에 휘둘리는 삶을 그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어떻게 더 낳은 삶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이미 충분히 나를 몰아붙이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43살이었다. 나 자신을 다그치고 몰아붙이면서 아무 생각없이 살았더니 어느덧 40을 훌쩍 넘겼다. 정년을 보장하는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서는 60세 정년을 기준으로 55세면 임금 피크제가 적용된다. 실무에서 제외되고, 임금은 낮아진다. 정년이후의 삶을 준비하라는 의미로 정부가/회사가 개인을 배려하는 제도이다. 25살부터 직장 생활을 한다고 가정하면 총 30년간 일을 한다는 것인데, 나는 이제 곧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일했으니 10년 정도 남은 것이다. 앞으로 일할 시간보다 일해왔던 시간이 더 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는 듯하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10년이라는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한다. 나는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도 채 남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기간을 늘리려고 발버둥쳐봐도 길어야 10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7~8년을 10년으로 늘리는 것이 아닌 인생의 제 1막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가끔 100세 시대가 부담스럽다. 정부와 사회는 국민의 삶이 100세까지 지속되는 것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개개인은 삶을 지속해야 한다. 결국 노후의 삶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 말은 제 2막의 삶에서도 노동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지 노동의 질과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럼 어떻게 인생의 제 1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나는 대기업 임원이나 CEO로 제 1막을 마무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운이 좋다면 나는 몇 년 후에 한번의 이직이 더 가능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레벨의 회사로는 이직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중소기업 임원으로 오는 분들을 많았다(지금도 이러한 경우는 많다고 한다). 대부분 50대 초반이거나 중반의 나이였으며 최대한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퇴직한 분들이었다. 퇴직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른 퇴직을 결정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직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큰 규모의 회사로는 이직이 불가능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직을 결정한다면 처음 시작했던 중소기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작한 곳에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에 불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부디 돌아간 곳에서도 내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마무리이다. 인맥을 이용해서 어느 작은 중소기업으로 이직하여 직함뿐인, 허울뿐인 임원이 아니라 비즈니스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직원이길 기대해본다.
어학연수 시절 에든버러 축제에서 봤던 연극에서는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다. 막과 막 사이에 쉬는 시간을 갖는데 배우들에게는 다음 막을 준비할 시간을, 관객들에게는 잠시 여유를 갖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갖는 쉬는 시간이다. 1막이 끝났다고 해서 연극 한 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몇 개의 막으로 구성되었던 모든 막이 끝나야 전체 이야기가 완성된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에 따라 제1막만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의 막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만큼이나 개개인의 인생은 다르기 때문에 절대 비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짧은 이야기가 있다면 긴 이야기도 있고, 슬픈 이야기가 있다면 행복한 이야기도 있듯 우리의 인생도 아니, 나의 인생도 그냥 달랐던 것이다. 이 간단한 인생의 원리를 찾는데 40년이 걸렸다. 1막에서의 연극이 힘들고 어려웠다면 잘 정비해서 2막을 준비하면 될 일이다. 인생의 모든 막 중에서 단지 1막을 망쳤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꺼져라, 꺼져라, 가냘픈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기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장한 듯이 떠들어대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배치가 떠드는 일장의 이야기, 소란으로 가득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맥베드 5막 5장 23~28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