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영 Sep 14. 2022

고통스러운 장례 절차

10시 즈음에 엄마, 동생과 나는 장례식장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방은 준비되지 않았고 의사의 검안서도 준비되지 않았다. 결국 1시에 의사는 병사로 진단을 내렸고 장례식장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통화했던 상조회사 팀장님과 장례절차를 상의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너무 울어서인지 눈이 너무 아팠다. 살면서 눈이 그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진통제를 6알을 먹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고 그제서야 상조회사와 상의해야 할 내용들이 머리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일들은 상조회사에서 처리해주었지만 몇가지 의사결정이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유골함, 납골당과 장례 기간이었다. 요즈음에는 유골함도 일반 유골함이 아닌 진공 처리가 된 유골함을 많이 사용한다며 카타로그를 내밀면서 적당한 가격의 유골함을 권해 주셨다. 결국 문제는 화장 날짜와 납골당이었다. 역시 폭증하는 사망자 때문에 화장 날짜가 3일 후 저녁으로 잡혔다. 그에 따라 장례는 5일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또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것은 장례식장에 몇일이나 있어야 하는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3일째되는 오전에 화장터로 향하게 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4일차 오후에야 장례식장을 비워줄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결국 2일차까지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받고 3일차에는 아빠만 병원(정확히는 냉동실이었다)에 남겨두고 가족들은 납골당을 답사하기로 했다. 4일차에 화장터로 향하고 5일차에 납골당에 모시는 스케줄로 움직이기로 결정한 순간 엄마가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을 포함하여 여러분이 오셔서 아빠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을 위한 찬송가 구절들은 어쩜 그리도 슬픈지 예배 드리는 중에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아빠가 진짜 돌아가셨다는 현실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눈물은 마르지 않고 계속 흘렀다. 짧은 예배 이후 조문객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주로 동생의 조문객들이었다. 화환 역시 주로 동생의 지인들이었다. 아빠를 위해 슬퍼해야 할 시간인데도 ‘아,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라는 자책이 들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그래서 성취한 것도 많았지만 그런 덕분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형편 없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가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늘 집에서 대화가 없었던 동생이었기에 사회 생활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늘 걱정이었다. 이런 나의 우려와는 달리 동생은 나보다 훌륭히 잘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과 나는 조문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주’라는 단어는 늘 남의 이야기였었는데, 그때 내가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미안해서 눈물만 흘리는 그런 상주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째가 되었다. 첫날 장례식 방이 비워지는 동안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입관식’, ‘발인식’이라는 낯선 단어들을 보면서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상세히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틀째 되던날 입관식이 있다는 것이다. 입관식을 위해 또다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손님들이 오셨고, 입관식이 진행될 장소로 이동했다. 입관식이 진행되기 전에 인터넷으로 정확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검색하면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을 포함하여 온 몸에 삼베 옷을 입히고 몸을 꽁꽁 묶는 행위를 한 후에 관에 눕히는 과정이 입관식이었던 것이다. 

아빠는 병원을 끔찍히 싫어하셨다. 특히 약을 먹고 깨어났을 때 섬망 증상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해서인지 팔을 묶어 두었었다. 자신의 팔이 묶였던 상황 때문인지 이빠는 더욱더 병원을 싫어하셨다. 나는 아빠가 죽은 이후에도 묶이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관식 전에 엄마에게 물었다. 입관식 때에는 꼭 이렇게 묶어야 하는지. 엄마는 기독교 절차에서는 묶지 않는다고 했다. 안심하고 입관식이 진행될 장소로 향했다. 

이후부터의 광경은 끔찍했다. 아빠는 얼굴을 제외하고 삼베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목사님께서 얼굴부터 볼 수 있게끔 준비해 두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포함하여 발과 손은 모두 삼베로 쌓여졌고 얼굴만 그대로였다. 밖에서는 찬송가가 울려 퍼졌고 입관식을 진행하는 팀장은 마지막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내가 알던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빠가 맞았지만 뭔가 달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봤을 때 고인에게 화장을 해둔다더니 그랬던 것 같다. 잠시 후 팀장은 아빠의 얼굴 역시 삼베로 감싸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뱃속에서부터 슬픔이 터져버리더니 눈과 목에서 쏟아져버릴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과 달리 팀장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빨랐다. 빠르게 아빠의 얼굴을 감싼 후 마지막으로 아빠의 얼굴을 만져보라고 했다. 

삼베의 촉감 말고는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끔찍히 싫었다. 아빠는 분명 답답했을 것이다.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답답한 것을 끔찍히 싫어했는데 본인의 몸을 이렇게 칭칭 감싼것을 알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었다. 나는 울면서 묶은 것을 푸르라고 소리쳤다. 분명 내 말을 들었을테지만 팀장은 또 빠르게 아빠의 다리, 몸을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동생을 포함하여 남자 몇 사람에게 아빠를 들어 관으로 옮기자고 했다. 아빠가 들어갈 관에는 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죽음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그 길이 꽃길이길 바란다는 의미라고 했다. 모든 과정 속에 나는 묶은 것을 푸르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옮겨진 이후 엄마는 팀장에게 묶은 것을 푸르라고 얘기했고 결국 아빠를 옥죄고 있던 끈이 풀렸다. 마지막으로 관이 냉동고에 이동되고 나서야 입관식이 끝났다. 

도대체 내가 뭘 봤던 것일까? 아빠는 왜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집에 가면 아빠가 있을 것 같았다. 울다 지쳐서 숨조차 쉬는 것이 힘들었다. 또 이틀동안 먹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 몸 하나 지탱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조문객을 맞아야 했고, 곧 방을 빼줘야 했기 때문에 비용처리도 해야 했다. 모든 것이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끝났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이틀 후에 다시 장례식장에서 모이기로 했다. 집에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당시의 상태 그대로였다. 아빠가 사용하던 의료용 침대, 사용하던 모자, 2만원짜리 신발, 자주 입었던 옷들. 그날 처음으로 엄마는 불을 켜고 주무셨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얘기해주지 않으셔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아빠가 그리워서 였는지 알 수 없다. 

다음날 일찍 우리는 납골당으로 향했다. 발인식 이후 아빠를 모실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상조회사에서 추천해준 장소를 먼저 방문했다. 원하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밝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납골당도 아파트와 같이 사람의 눈높이가 로얄층이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납골당 방은 어두운 편이었지만, 아빠를 모실 방은 환하고 밝아서인지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아빠의 영혼이 어두운 곳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는 아빠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빠의 물건을 보는 것이 엄마에게는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빨리 치웠던 것이다. 나 역시 엄마를 도와야 했지만 도저히 같이할 수 없었다. 아빠의 물건을 내 손에 쥘 때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2시 즈음에 우리는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보내드려야했다. 영정 사진을 누가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았다. 상주는 영정 사진을 들지 않는 것이 맞지만, 사위와 조카가 없는 관계로 영정 사진은 내가 들기로 했다. 역시 교회 분들이 와주셔서 아빠의 관이 리무진까지 옮겨지는 동안 찬송가를 불러 주셨다. 맨 앞에 서있던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빠가 위치한 곳만 바라보았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영정 사진을 들고 있던 나는 기사님과 함께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엄마가 보았다면 더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사진을 꼭 껴안고 쓰다듬으면서 파주로 향했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리무진이 많았다. 화장터로 들어가는 것 역시 도착한 순서데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여섯번째였다. 도착해서도 행정처리는 나의 몫이었다. 번호를 부여받고 검안서를 보여주고 계산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도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상조회사 팀장은 앞으로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6시에 관이 들어가면 1시간 30분에서 40분즈음 소요될 것이란다. 원래는 2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코로나19로 빠른 처리를 위해 불의 화력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이후에 고인의 몸이 타고 남은 상태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했다. 상태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6시가 되어 아빠가 잠들어 있던 관이 옮겨졌다. 이때도 나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앞장섰다. 아빠의 마지막을 내가 인도했다는 것이 나를 위한 위안인지, 아빠에게 불효인지 모르겠다. (아빠는 살아계셨을 때 분명 내가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아빠가 불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을 함께했다. 이후 화장터 문이 닫히면 가족들은 작은 방에서 기다리게 되어있다. 작은 스크린에는 진행 상태를 보여준다. 그 방에서도 나는 아빠의 영정 사진과 둘이 남겨졌다. (가족, 친지들은 모두 다른 곳에 계셨던 것 같다) 그 방에서 나는 아빠와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 아빠, 여기서 많이 아팠으니까 천국 가서는 행복하게 지내. 꼭 천국으로 가. 미안했고 고마웠어. 우리가 있는 이 곳에서는 너무 아팠으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행복하게만 지내. 잘가’

스크린에서는 ‘냉각중’으로 상태가 바뀌었고 팀장이 오더니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상태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미를. 결국 타고 남은 아빠의 뼈였다. 관을 덮고 있었던 십자가, 관, 꽃, 아빠가 입고 있었던 삼베 모두 사라지고 뼈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이후였다. 뼈를 모으고 난 후 진행하던 사람이 물었다. ‘가루로 만들어 주냐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미 한번 죽였는데 또 죽이라는 말인가? 결국 유골함에 모시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장례 과정 하나하나가 소름끼치도록 힘들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아빠와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납골당은 6시 이후에는 입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큰 고모가 우리 집으로 함께 오셔서 엄마가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유골함과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조금은 무서웠다고 했다. 엄마는 원래 겁이 많다. 잘 놀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면 손발이 먼저 떨린다고 했다. 하지만 큰 고모가 함께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다음날 일찍 우리는 아빠의 유골함과 함께 납골당으로 향했다. 동생이 운전해야 했기 때문에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갔던 사람도 나였다. 아빠가 살아있었을 때에는 단 한번도 손을 잡아보거나 안아주지 못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 그리고 납골당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빠의 영정 사진으로 가장 먼저 앞장 섰던 사람도 나였다. 아빠를 보내드리는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했지만 여전히 살아 계셨을 때 못해드린 것은 한으로 남는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고모들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고기와 냉면을 먹는데 나는 또 목이 메였다. 유난히 고기를 좋아했고 아프고 나서는 냉면을 많이 찾았던 아빠였다. 당연히 아빠가 생각났고 음식이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창 밖은 봄의 기운으로 꽃들이 활짝 폈는데, 아빠는 이 예쁜 꽃들도 이제는 못 보는 것이다.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저녁이 되어서야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119 구급대원이 아빠의 몸에 부착한 심장박동이 생각났다. 분명 구급대원 분들은 아빠의 사망을 알려줬지만 나는 분명히 기계에서 아빠의 심장 박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었다. 내 눈으로 더 확실히 확인했어야 했는데, 구급대원 분들은 가족들이 아빠를 보내 드린다는 말을 오해하여 사망하지 않은 사람을 사망했다고 말한 것을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아빠를 냉동고에서 얼어 죽게 만든 것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검안서를 건네 주었던 의사에게 문자를 남겼다. 분명 그때 당시 아빠는 사망하지 않았는데 냉동고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는 내용으로. 잠시후에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였다. 몸이 굳은 상태, 피가 가라앉은 정도 등등을 고려했을 때 사망 시간은 새벽이 맞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빠는 의사가 검안할 때까지 냉동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본인의 판단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최소한 내가 아빠를 죽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아빠는 좁디 좁은 냉동고에서 얼어 죽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 17화 갑작스러운 이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