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여전히 병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고 전화를 할 것만 같았다. 집에 있으면 아빠가 밖에 있을 것만 같았고 밖에 있으면 아빠가 집에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해야할 일들은 많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아빠가 사용하던 의료용 침대, 휴대폰과 통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짧은 휴가대비 장례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또다시 평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서두르기로 한 것이다. 의료용 침대는 구매했던 곳에 연락하여 회수해갈 수 있냐고 문의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휴대폰 매장에서 아빠가 사용하던 전화를 해지했고, 통장의 돈도 인출했다.
아빠가 코로나로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는 아빠한테 자주 전화를 드리라는 잔소리를 했다. 평소에 아빠와 대화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살가운 성격도 아니기 때문에 싫다고 했지만 엄마는 계속 강요했다. 마지못해 몇 번 전화를 드렸지만 아빠는 그때마다 말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빠와 통화를 끝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 적어도 지금은 아빠한테 전화하면 받아 주기라도 하지.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시면 이 번호로 전화해도 아빠가 받아주지 않을 꺼야. 더 자주해야 하는데.. 하지만 마음 뿐이었다. 어색했고 쑥스러웠다.
그런데 아빠가 사용하던 휴대폰을 해지하고 나서는 진짜 전화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쩜 이리도 나는 어리석기만 한지.. 또 후회가 밀려오면서 눈물이 흐른다.
다음날 의료용 침대를 회수해갔고 엄마는 아빠의 물건을 또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사용했던 물건 어떤 것도 내 손으로 만질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와 몰래 울기 시작했다. 물건을 치운다고 치웠는데도 여전히 아빠의 흔적들이 많았다. 투병 생활동안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빠를 위해 사다 놓은 음식들이 냉장고에 넘쳐났다. 냉장고를 열때마다 아빠가 생각나는 음식들, 아빠가 사용하던 밥그릇, 컵 등등.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빠는 손재주가 좋아서 집안 구석구석 아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당에 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대추나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매달아 둔 작은 박카스병, 콘센트를 잘 구분하라고 붙여 놓은 스티커, 겨울에 춥지 말라고 화장실에 설치한 난방장치 등 아빠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이것은 아빠가 간신히 걸을 수 있을 때 해 놓은 것이라 더욱더 아빠 생각이 많이 난다.
우리집은 지은지 50년이 넘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더 춥고, 여름에는 더 더운 노후화된 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곳곳에 불편함이 많다. 특히 거실에 설치한 난방 장치는 아빠가 나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다. (물론 화장실의 난방 장치를 포함해서) 출근하기 전에 방문이 삐걱거린다고 말하면 퇴근 후에 삐걱 거리던 문이 고쳐져 있었고, 수도꼭지가 고장나도 모두 아빠의 손을 거치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우리집은 여전히 노후화된 그 상태이기 때문에 생활의 불편함이 많다. 하지만 이제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다. 더 이상 나를 위해 난방 장치를 설치해줄 아빠가 없는 것이다.
요즘에서야 생각해본다. 아빠가 원망스럽고 미웠기 때문에 자식인 나는 아빠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채로 살아왔다. 물론 아빠가 눈치 채지 않았을 리는 없다.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 역시 나를 어려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에게는 짜증도 내고 잔소리도 많이 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내가 하는 말은 다 들어 주셨다. 아빠의 담배 연기가 싫다고 얘기하자 아빠는 20년 가까이 피웠던 담배를 끊으셨고, 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하자 고구마를 심으셨다. 그냥 살 수도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재배해서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아빠를 외롭게만 했을까? 왜 아빠에게 살가운 딸이 못 되었을까?
내가 아빠를 좀 더 빨리 이해하고 다정한 딸이었다면 아빠가 조금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 때문에 더 빨리 돌아가셨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한편에는 아빠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틀 후에 또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셨다. 삼오제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는 이런 절차를 따르지는 않지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방문하셨다고 했다. 또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흐른다. 내 안의 수분이 모두 눈물로 없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면서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빠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지? 이게 6개월에서 1년은 갈꺼야. 힘내고 어머니한테 더 잘해드려. 이제 어머니의 동반자이자 말동무가 없어진거니까 얼마나 허전하시겠어’. 그랬다. 나보다 더 슬픔을 느끼는 것은 엄마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불을 켜야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은 단독주택이라 1년에 한번은 정화조를 쳐야 한다. 이 일은 늘 아빠 담당이었다. 단 한번도 엄마나 나, 동생이 신경써 본적이 없었다. 이제는 엄마가 해야 할 일이라며 전화를 걸고 방문 일자를 조율하시는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집안 곳곳에 네 아빠 손을 안 거친 곳이 없네, 오늘 더 네 아빠 생각이 난다’ 이 말을 듣는 나는 또 목이 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