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나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는 좋게 말해서 감정에 솔직한 편이고 나쁘게 말해서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그런데 유독 그 대상은 나를 빗겨갔다. 엄마와 동생에게는 늘 잔소리를 달고 사셨고 감정이 격해지면 짜증도 많이 내셨다.
동생이 회식으로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아빠의 잔소리 폭격 대상은 엄마였다. 전화해서 빨리 들어오라고 해라,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해라, 술을 마시면 운전하지 말라고 해라.. 동생이 들어올 때까지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이 도착하면 잔소리 대상은 엄마에서 동생으로 바뀌었다. 술마시고 운전은 어떻게 한거냐, 그럴꺼면 나가서 살아라..이런 잔소리를 30분에서 1시간은 들어야 끝이났다. 이 과정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던 사람은 항상 나였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감각에 예민한 편이다. 빛, 소리 등 감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민감하여 금방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아빠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 역시 유일하게 나였다. TV 볼륨을 크게 한다 던지, 나 역시 짜증을 낸다 던지 해서 아빠의 잔소리를 끊곤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운전 연습을 할 겸 엄마와 근방을 드라이브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 식당은 아빠와 종종 와서 밥먹곤 했는데 맛이 있었다’, 또는 ‘여기서 조금만 가면 니가 사달라던 빵집이 있는 곳이다’라고 하곤 했다. 그때 그날일이 문득 생각났다. 크림이 가득한 단팥빵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TV에서도 맛집으로 많이 소개되었어서 한번은 먹어보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멀지 않다고는 하지만 왕복 2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빵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빠에게 사다 달라고 했다. 아빠의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마디도 없이 차 키를 집어 드셨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함께 나설것을 강요하셨다. 2시간이 좀 지나서 아빠는 손 한가득 빵을 사오셨다. 그 빵을 건낼 때 엄마는 ‘아빠는 니가 얘기하는건 다 들어준다고’고 한마디 내뱉으셨다.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얘기한 것이 옳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나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았고 내 눈치를 보셨던 것 같다. 같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을때에도 늘 양보하는 엄마가 안스러워서 ‘엄마도 좀 먹어’라고 얘기하면 아빠는 빨리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는 절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그런 아빠가 유독 눈치를 봤던 사람이 나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빵을 사다 주는 사람은 없다. 나를 위해 지하철 역까지 기사 역할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내 눈치를 보고 사셨는지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본인 입장에서는 최소한 딸을 위해서만큼은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딸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왜 후회라는 감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인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