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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Apr 20. 2022

이응의 우주

1. 시발


4년 전의 이응에게 코스모스는 그저 이른 가을 길가에 피는 꽃이었다. 꽃잎 끝이 뾰족뾰족 얕게 갈라진 맑은 자줏빛의 꽃. 그래서 이응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코스모스라는 말을 한 사람을 낯설고도 신선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응은 식물, 꽃, 들꽃 뭐 그런 거에 관한 책이냐고 순진한 표정을 하고 물었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그 물음의 답으로 받았다. 이응은 그날 저녁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야 코스모스라는 단어에도 다른 뜻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 또는 세계. 코스모스.


그 후 3년 동안 이응은 코스모스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이른 가을 길가에 피는 꽃이든, 문방구의 지우개든, 칼 세이건의 저서든 코스모스라 이름하는 모든 것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받은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마주했던 한심하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처음엔 창피함과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과 양 귀를 붉히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날의 자신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단지 광활한 우주에 먼지 같이 작은 스스로가 귀여워서 그런 생각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코스모스는 어느 서점에 들어가도 과학 서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제일 감명 깊게 읽힌 책이 되기 충분해 보였다. 모 서점에서 한 여섯 번째쯤 우연히 코스모스를 마주했을 때 이응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손을 달달 떨어가며 코스모스를 구입했다. 그렇게 이응의 손에 들려 이응의 집에 들어온 그 책은 이응의 책장에 한 8개월쯤 안치되었다. 그 옆에는 같은 날 이응에게 들려온 이기적 유전자가 함께 했다. 하지만 떨림과 울림은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는데, 한 반에서 조금 덜 읽힌 떨림과 울림은 89쪽쯤 4겹 종이를 품고 책상 위에서 4개월을 잠들어 있었다. 그건 단지 이응이 게을러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응은 리을과 달리 글을 쉽게 읽어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응은 제 돈을 주고 코스모스를 살 때 그렇게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종이 위의 활자들은 이응의 눈앞에서만 춤을 추었다. 커졌다 작아졌다,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경련을 하듯 떨다 유영을 하듯 흘렀다. 이응은 매 쪽에서 흑백 무도회를 만났다. 이응이 가장 아름다운 흑백 무도회를 본 건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였다. 이응은 술 한 방울 안 마시고도 속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이응은 겁이 났던 것이다. 대작 코스모스 역시 그 책의 두께로 보나 그 내용으로 보나 그 무도회가 안나 카레니나 못지않은 보통 축제가 아닐 것을 어렵지 않게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8개월 뒤 코스모스는 이응의 책꽂이에 안장될 뻔하다가 다행히 안치만 되고 협소한 독서대에 올랐다. 오래 잠을 자며 한을 품은 코스모스는 종종 지난날의 자신 같이 이응을 재웠다. (자신만 당할 수 없어서였을까.) 이응은 코스모스 앞에 자주 고개를 떨구고 무너졌다. 그러다가도 유려한 문장들을 발견하면 연신 감동을 하며 세 번 네 번 읽기 바빴다. 메모장 어플을 켜 토독토독 그 문장들을 남기기도 했다. 이응이 코스모스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까지 꼬박 8개월이 걸렸다. 책을 충실히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도 여전히 코스모스가 정확히 무얼 가리키는 말일까 이응은 계속 생각한다. 하지만 또렷한 이미지를 얻지 못하고 그저 유니버스와는 구별되는 무언가라고 감만 잡을 뿐이다. 코스모스가 무엇인지 조금 알겠다가도 그 피상적인 이미지 너머 거대한 무언가를 이르는 단어인 것을 떠올리면 그 크기와 존재만큼 무한히 아득해진다. 그렇게 의미 위에 놓인 초점이 풀려버린다. 그러면 이응은 괜히 자신의 목 뒤의 타투를 만지작거리며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앎만 가져가기로 할 뿐이다.  


한편 이응은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곱씹을수록 그 단어가 썩 마음에 들었다. 코스모스만큼 복잡한 스스로의 우주에도 질서와 조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의 마음이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코스모스는 이응에게 이응이 아는 한 가장 큰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면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4년 후의 이응에게 코스모스는 이른 가을 길가에 피는 맑은 자줏빛 꽃 그 이상이 되었다.


이응은 거대한 코스모스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스스로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시작한다. 이응의 우주. 광막한 우주의 작은 먼지에게도 나름의 속사정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하찮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다. 이응은 스스로를 쉽게 귀여워하는 사람이다.) 이응은 무슨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호기롭게 스스로의 우주에 대한 것들을 글로 남겨 보기로 했다. (그때 이응은 한 가지 큰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스스로가 난독이 있는 사람인 한편,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투머치 라이터가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의 이응은 그렇게 스스로의 우주에 대한 고민을 하며 글을 쓴다. 퇴고도 한다. 순조로운 퇴고를 거쳐 잘 다듬어진 글 앞에선 어느 날 별안간 누군가의 삶을 잠깐 구하는 상상을 하고, 퇴고하기 싫은 날것 그대로의 글 앞에서는 칼 세이건도 처음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유식하고 따스운 사람인지 몰랐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응은 계속 글을 쓰고 고친다. 그러다가도 왜 자신이 지독하게 글을 쓰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는 별안간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응은 영혼과 운명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끙끙대다가 리을에게는 그저 정성을 바르고 덧대는, 예술을 하고 싶은 거라고 둘러댔다.


어쨌든 이응은 계속 고민을 하고 글을 쓰고 퇴고를 하기로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어느 새벽 코스모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 위에 손을 가만히 얹어 숨을 골랐던 것처럼, 스스로의 우주에 대한 고민과 글과 퇴고에도 마지막을 고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그러다 덜컥, 자신의 우주도 역시 팽창하고 있어 이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까 겁을 내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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