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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Apr 20. 2022

이응의 우주

2. 이응


이응은 스스로의 우주에 대한 이야기의 처음으로 어떤 기억을 선택할 것인가 생각에 잠긴다.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결심하자 두 개의 기억이 각각 이응의 왼쪽 눈앞에, 그리고 오른쪽 눈앞에 펼쳐졌다.


이응의 왼쪽 눈앞에 있던 기억은 강렬한 ‘잘못됨’의 기억이었다. 때는 2016년의 겨울, 모든 색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이응이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건 주황색의 주방 보조등 아래 세라믹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다가였다. 이응은 라벤더향 주방세제를 수세미에 묻혀 그릇을 박박 문지르다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와 가슴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핑글 돌다가 사선으로 쩍-! 하고 갈라지며 덜컥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손에 든 접시가 깨진 것은 아니었다. 조각난 건 이응의 안에 있는 무엇이었다. 이어 명치 한가운데 강력한 중력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등의 모든 면적에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불안을 느꼈다. 그리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이응의 존재를 지배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

이응은 낯설었다.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이응은 스스로에게 설명이 될 것을 찾기 위해 최근의 자신의 삶을 먼저 살피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빠뜨린 것은 없었나. 무언가를 오래 잊고 살았나. 무언갈 과하게 했나. 특별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점점 더 먼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 삶을 헤집어 봐도 ‘특정한 이유’로 걸려들어 스스로에게 설명이 될 만할 것을 찾지 못했다.

이응은 이상했다. 이응은 분명 이응의 생각에 별안간 이런 기분을 느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응은 스스로 여기기에 스스로의 삶을 욕심 있게 사는 사람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응은 바짝 긴장하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었고, 그런 매 순간의 자신에게 나이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응은 상황이 시키는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선택한 최선의 것에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응의 생각에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최선을 다하여 산 삶의 최선의 결과가 아니었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절망의 문장들로 견고해졌다.

이응은 절망적이었다. 이응이 한 최선의 선택들이 사실은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이응이 최선을 다해 한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응을 구성한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이응은 억울하고 불쾌했다. 그 불쾌는 얼마 못가 불안에 의해 쉽게 지워졌다.

이응은 불안했다. 이응이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불안을 온몸으로 견디며 거품이 묻은 그릇을 깨뜨리지 않고 물로 잘 헹궈내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그릇을 건조대에 내려놓을 때까지 이응의 불안은 여전히 이응의 등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이응은 쿵쿵 바닥으로 꽂히는 심장을 팔짱으로 애써 받쳤다. 이응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뜯으며 협소한 주방을 계속 배회했다.

이응은 부엌의 한 면에 있는 큰 창이라 해야 할지 문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크기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축축한 밤공기가 부엌으로 스멀스멀 들어왔다. 창밖의 골목엔 이응의 집 부엌과 사뭇 다른 주황의 고요함이 깔려 있었다. 불국의 겨울 공기가 한국의 겨울 공기처럼 살을 엘 듯 매서웠다면 굳이 그 밤중에 건너 골목에 사는 영화감독 언니를 괴롭히러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해 겨울, 그날 저녁의 불국 공기는 유독 차지 않고 축축하기만 했다.


이응의 오른쪽 눈앞에 있던 기억은 ‘기억의 기억’이었다. 2020년의 여름의 끝, 바람에 설익은 가을 냄새가 은은하게 묻어 불어오던 어느 날, 이응은 시옷과 리을에게 비장한 카톡을 보냈다. 이는 이응이 평소에 짓궂은 표정으로 시옷과 리을에게 뽐내듯 풀어놓았던 것과는 분명 다른 성격의 이야기였다. 이응은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참 못할 짓을 한 게 맞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에게 너무 오래 속았다고 카톡을 이었다. 그날 이응은 자신의 어리숙한 비장함을 감당하느라 자주 오타를 냈다. 격한 마음을 따라와 주지 못하는 뚱뚱한 손가락 탓에 단어를 빠르게 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응의 말들을 늘 귀하게 들어주는 시옷과 리을은 그날도 참을성 있게 이응의 모든 말들을 기다려 주었다.

“이응아, 나는 너가 너무 대견해. 너무 대단해. 나는 너가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 나는 너가 이렇게 변한 게 너무 대견해.”

이응은 시옷의 뜻밖에 과한 지지에 얼떨떨했다. 물론 시옷과 리을은 늘 이응을 호의로 대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응이 죽 늘어놓은 말들은 시옷과 리을에게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말들임을 이응은 잘 알고 있었기에(왜냐하면 이응은 종종 자신의 가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웃긴 시트콤의 한 에피소드처럼 그려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모종의 장황한 설명을 해야 할 수도 있겠구나 각오를 했었다. 그러한 비장한 각오의 마음 앞으로 돌아온 시옷의 지지의 말들은 -부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과분한 말들이었다. 그래서 이응은 시옷에게 바로 고마워하지도 못하고 “응? 뭐가?”하고 되물었다. 대답으로 돌아온 시옷의 카톡은 마치 시옷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살아나 이응의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너 기억나? 너 안 그랬어. 전에는 내가 너한테 그거 다 니 탓이 아니고 너희 부모님 탓이라고 할 때, 너는 아니라고 했어. 너는 그거 못 들었어. 그날, 우리 같이 밤새 우리 집 거실에서 이야기하고, 너 리을이랑 거실에서 잔 날, 너는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그건 나에게 불가능하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랬어. 다 너 탓이고, 다 너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그랬어. 너 정말 많이 바뀌었어.”

리을은 소리꾼 옆 고수처럼 중간중간 “맞아.”, “맞아. 나 기억나!”하며 시옷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장단을 맞추었다. 이응은 “내가? 내가 그랬다고? 내가 그랬나…?”하다가 어렴풋이 그날의 기억 조각들이 아득하게 기억 저편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기억 조각의 어느 귀퉁이에 이응의 “아니, 어떻게 그래… 나는 못 해….”하는 음성이 걸려 있었다. 이응은 그 기억 조각을 붙잡아 그날은 듣지 못했던 시옷의 말들을 새로 입혀 다시 기억을 돌려 보았다. 그러자 그 기억 속에 거실 조명이 더 따뜻한 빛으로 빛나고, 그날 덮었던 이불이 더 보드랍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응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며 두 기억을 곱씹는다. 여전히 어떤 기억을 다른 기억의 앞에 놓아야 만족스러울지 고민한다. 이응은 시선을 자신의 손 끝으로 옮긴다. 왼쪽 눈앞에 있던 기억을 엄지손가락 앞에 놓는다. 그리고 오른쪽 눈앞에 있던 기억을 검지 손가락 앞에 놓는다. 프랑스에서는 1을 엄지손가락부터 펴며 세고, 한국에서는 1을 검지 손가락부터 펴며 센다는 사실이 참 우연치고는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이응은 이내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이응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어떤 기억이든 상관없다고 스스로의 우주가 말을 해주는 것만 같아 이응은 이쯤 하고 빠져나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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