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
오늘 갑자기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개가 아프다면서 진료를 봐 달라고 하는 것이다.
전화통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원한 보호자와 강아지.
"형님! 잘 지내셨지예"
인사를 하는 보호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쿤이'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11살이 넘은 잉글리시 세터 '쿤이'
배에 어른 주먹보다 큰 유선종양을 달고 있었다.
방사선 검사에서는 이미 폐에까지 전이가 많이 된 상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진료를 마친 뒤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고등학교 겨울 방학 즈음이었을 것이다.
춥지 않고 따스한 햇볕이 들던 그날, 대청마루에서 멍하니 도로가에 지나는 차들을 보고 있는데,
도로에서 동네 안으로 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국 적인 사냥개 한 마리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긴 꼬리, 흰 바탕에 갈색 점박이 무늬를 하고 가슴 아래로는 살짝 휘어진 털들이 풀어 늘어진 게
아주 멋스러워 보였다.
잉글리시 세터.
나중에 알게 된 이 사냥개의 품종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저런 개가 없는데’ 하고 신기해하며 대문 밖을 나서서 그 사냥개를 불렀다.
때마침 마실 나왔던 뒷집 아저씨도 그 개를 보고 있었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쓰다듬으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버렸다.
부모님은 임자 있는 개면 어떻게 하냐고 다시 내보내라고 하셨지만,
"잠깐만 데리고 있다가 임자가 나타나면 돌려주면 되죠" 라며 고집을 피웠다.
몇 가구 되지 않는 동네라 어느 집에 어떤 개가 있는지를 다 알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 사냥개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집 인양 마루 앞에 앉아서 집 앞에 사람이 지나가면 짖기까지 하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는 그 강아지의 주인이 되었고,
처음 같이 개를 발견한 동네 아저씨는 자기가 먼저 봤는데,
내가 사냥개를 가로챘다면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였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고 시나브로 가족의 일원이 되어갈 무렵, 진짜 희한한 일이 발생했다.
눈이 소복이 내리던 밤, 불러오는 배 모양새가 아무래도 새끼를 가진 것 같아 바람이 들지 않고 따뜻한
곳으로 자리를 마련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섯 마리의 예쁜 강아지가 태어난 것이다.
개들의 임신기간을 따져보니 집으로 들어올 때가 임신 갓 1달이 넘은 때였던 것이다.
이런 뜻하지 않은 선물에 우리 가족들은 모두 좋아했다.
뛰어놀 넓은 마당이 있던 집에서 강아지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계절이 두어 번 지나자 어느덧 멋있는
성견이 되었다.
멋있는 사냥개 여러 마리가 마당에서 뛰어노는 광경을 보던 뒷집 아저씨는
"내가 먼저 저 개를 봤는데, 자가 먼저 개를 델꼬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저기 저래 예쁜 새끼까지 배가 있을 줄 우째 알았겠노"
또 한 번 아쉬움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친구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기 위해서 뒷산의 전나무를 베어 집 마당에서 나무를 다듬으려고
풀어져있던 사냥개들을 묶어두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개들을 풀어두는 것을 잊은 채 트리 장식을 위해 바삐 집을 나섰다.
공기는 차고, 산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스산한 바람에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던 밤.
밤새 잠귀 밝은 아버지조차 개 짖는 소리 하나 듣지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 항상 반가이 맞이하던 개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 도둑.
여름철이 되면 개장수들이 도로가에 있는 큼지막한 개들을 낮에 눈여겨 두었다가 밤에 와서 들고 가곤 했다.
특히 복날이 다가오면 대문 밖 오토바이 소리(옛날 개장수가 오토바이를 많이 타고 다녔다)에도 민감하여
마당에 있는 개들을 살펴보곤 했다.
그래서 여름철 특히 밤에는 개를 묶어두지 않는다.
개를 풀어두면 훔쳐가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에 개를 도둑맞다니….
그날 밤 우리 집을 비롯해 집 앞 국도로 연결된 여러 동네의 큰 개는 모조리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충격에 아버지는 그 이후로는 개를 기르지 않으셨고,
동생은 ‘ 히야(형)가 개를 묶어 나가지고 다 도둑맞은 거 아이가. 책임져라’며 나를 원망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는 동생의 눈에는 원망의 눈빛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는 듯하다.
잉글리시 세터를 보면 기억 저편에서 개들이 뛰어놀던 텅 빈 마당을 보며 눈물짓던
추운 크리스마스이브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