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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 Apr 23. 2020

한 줄 여행 #8

당신이 그곳으로 떠나야 할, 단 한 줄의 이유 #8

"철학자도 가끔 동화책을 읽나봐"

하이델베르크, 독일 (Heidelberg, Germany)


독일을 대표하는 것들은 많다. 맥주, 축구, 자동차, 철강, 화학, 그리고 철학.

만약 독일을 철학의 나라로 불러도 된다면, 철학의 도시는 단연코 하이델베르크의 몫일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기차역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카강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강을 먼저 건너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 수도 있고, 강을 따라 구시가지부터 보는 반시계방향으로 돌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추천한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출처 : schloss-heidelberg.de

역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하이델베르크성으로 가자. 이 오랜 고성에는 의외의 장소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과거 어떻게 약을 조제하고 보관했는지를 보여주는 '독일 약국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지름 7미터, 길이 8.5미터의 독일에서 가장 큰 와인저장고다. 무려 22만 리터의 와인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 나라는 술 때문에 약이 발달한 것인지, 약을 믿고 술을 사랑한 것인지 심히 궁금해진다.


성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구시가지다. 구시가지를 걷다보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그렇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건물이 나온다. 조선 건국보다 앞선,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이델베르크대학이 만든 '학생감옥(Studentenkarzer)'이다. 과거에는 대학이 치외법권 지역이라 학생들이 술 먹고 사고 치면 여기에 가두었다고 한다.

낙서가 빼곡한 벽에서는 '토마스 왔다감' 같은 킥킥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여행 와서 웬 감옥 구경인가 했던 코웃음이 빙그레 미소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래, 취하고 깨지고 급기야 '큰집 무용담'을 떠들고 다니는 이 치기 어린 낭만의 권리를, 무모한 청춘이 아니면 또 언제 누려보랴.


출처 : roterochsen.de

구시가지 캠퍼스 주변에는 대학가다운 활기가 넘치고 우리나라 호프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선술집들도 많다. 왜 학생감옥이 생겼는지 바로 납득이 된다.

대표적인 가게는 '붉은 황소(Zum Roten Ochsen)'.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배경이라는데, 촬영장소는 아니고 설정을 따온 것 같다. 황태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가 저런 여관 겸 선술집에서 일한다. (포스터에도 맥주잔...)


출처 : heidelberg-marketing.de

주량만 허락한다면 선술집 구석에서 한잔, 그리고 구시가지 중심인 마르크트광장(Marktplatz) 노천에서 또 한잔을 즐겨도 좋다. 잠시 황태자님처럼 하이델베르크 유학생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광장 앞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도 기웃거려볼 만하다. 운이 좋아 날씨가 맑다면 예쁜 첨탑에 올라 도시전망을 즐길 수 있고, 더 운이 좋다면 예배당 내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제 구시가지를 뒤로 하고 네카강을 건널 때다. 비스듬한 아치를 잇댄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면 '뱀의 길(Schlangenweg)'이라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리고 이 길 끝에는 하이델베르크 지성과 사유의 상징이 된, 대망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여기가 왜? 하는 문제제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출처 : heidelberg-marketing.de

그럴 땐 고개를 돌려 강 너머를 바라보면 된다. 하이델베르크가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이,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로 동화 속 마을 같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그저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시가지의 들뜸도, 사람들소음도 모두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불과 몇분 전까지 내가 저 그림 속있었다는 사실조차 꿈만 같다.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나밖에 없는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그렇게 빠르게 철학자가 되어본다.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뭐가 됐든 '너의 사색은 틀려먹었다'고 칸트가 따지러 올 일은 없겠지.


"하이델베르크, 철학자도 가끔 동화책을 읽나봐."



당신의 심장을 설레게 할, 당장 배낭을 꾸리게 만들, 그곳으로 떠나야 할 단 '한 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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