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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Jan 06. 2021

그녀의 뻔뻔한 그 한마디가 부러웠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다시 보니 느껴지는 것

"우리 어디 가서 차나 한 잔 할까?"


10년도 더 된 지상파 TV 드라마를 오랜만에 OTT 플랫폼으로 다시 봤다. 남자 주인공 지오의 첫사랑이자 옛 연인이 되어버린 연희가 지오에게 던진 저 한마디. 20대 때엔 이 드라마를 몇 번을 다시 봐도 연희가 너무나 거슬리고 짜증이 났는데 지금 다시 보니 어쩜 저렇게 당당한가 싶다. 본인이 먼저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 남자 친구는 이제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나 외줄 타기와도 같은 불안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불쑥 나타나 지오의 마음을 한 번씩 흔들어 놓는다. 


나는 연희의 저 뻔뻔한 대사가 참 부러웠다. 상대의 상황이나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희의 정확한 심경은 무엇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별 후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이 불완전했고 그것을 위로받고 싶거나 혹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과거의 연인 지오였기 때문에 용기 내어 다가갔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연희의 당당함을 부러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난 과거의 연인에게 단 한 번도 당당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은 것 같기도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때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했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도 차마 그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말인지 아니면 단순한 남의 사랑 얘기에 대한 오지랖에 불과했던 말인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친구들의 얘기만 듣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내 자존심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상대가 먼저 나에게 찾아와도 나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말 그대로 노력을 했을 뿐, 내 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땐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한 때 죽고 못살며 사랑하던 관계였던 상대에게 내가 당당하게 얘기할 수 없고 얼굴을 내비칠 수 없을만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드라마 속 연희는 알게 모르게 여지를 남기고 잦은 만남을 이어갔지만 결국 지오는 연희 이후에 만나게 된 후배 준영과의 사랑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에서는 지오와 준영의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나타난 방해 요소 혹은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로 첫사랑 연희가 이용된 것처럼 보였지만, 30대가 되어 다시 본 연희는 여전히 얄밉고 거슬리는 과거의 연인이지만 나이를 더 먹고도 당당하고 용기 있고 현재의 감정에 충실할 줄 아는 여자였다. 


상대방이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갔어야 했다. 거절을 당하든 해피엔딩이 되든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관계의 평행선이 만들어지든 결과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연이라면 내가 그렇게 당당하게 다가갔을 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해서 연희처럼 다시 차를 마시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비록 해피엔딩이 되지 않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더 빠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더 어리고 피부도 좋고 체력도 쌩쌩하고 더 날씬하고 생기가 넘쳤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는지 싶다. 


그래. 어쩌면 이런 얘기도 30대를 한참 보내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얘기고, 감정이 성숙해졌다고 믿고 있을 땐 이미 나는 관계에 있어서 여유를 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20대의 내가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연인과의 관계도, 사랑을 지키는 문제도 모두 그저 쉽게만 느껴져서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마냥 재밌기만 하던 드라마는 이렇게 오랜만에 또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이렇게 생각을 한 번 정리해두고 나면 '나 그래도 이제 진짜 어른인가 보다' 라며 나 스스로를 토닥이며 흐뭇해할 거다. 아직 잠은 오지 않지만, 오늘 하나도 바쁘지 않고 피곤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라고 생각하며 이 새벽을 조금만 더 즐기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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