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장면

마지막 데이트.

by maudie

어떤 이의 이별 이야기를 가만히 읽고 있자니 내게 떠오른 인상 깊었던 안녕이 있다. 아주 갑자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 그날의 장면들은 때때로 어떤 언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마치 지금 내 눈앞에 재생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그와는 이 장면을 끝으로 얼굴을 마주한 기억은 더 이상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의 연락은 그로부터 1년 정도 뜨문뜨문 전송되어왔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한 기억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에 이별의 장면중 어쩌면 가장 평온하고, 정말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 장면을 끝으로 후에 온 연락들은 그 장면을 미화시킨 나의 기억을 타박하려는 듯했지만, 여전히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은 예쁘다. 그래서 종종 떠오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마치 끝난 영화의 명장면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에겐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있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인연이 시작되었지만, 아주 평범한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아니, 평범하지는 않았던가. 가벼운 시작 때문이었는지, 약간의 거짓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랜 만남 동안 거짓은 제자리를 찾았고, 신뢰를 새로 다졌다. 시작선에선 내가, 마지막 즈음엔 그 사람이 서로의 미래를 꿈꿨고, 결혼을 해 가족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우리는 점점 어긋났고, 나는 이별을 고했다.


함께한 시간이 꽤나 길었던 만큼, 아쉬움이 컸다. 그 사람은 서울에 교육이 있어 올라왔다고 마지막 인사는 우리 얼굴을 보고 하면 좋겠다고 내게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몇 번의 거절 끝에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사실 자리에 나가기까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하고 만나지 않은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미움보다는 정이 더 컸기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인사이기도 하고, 우리가 만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쓰고 나갔다.


경복궁역 앞에 위치한 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 사람은 여전히 반듯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 사람은 살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라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식사를 하기 전 조금 걷기로 했다. 경복궁 역에서부터 청계천까지 걸었다. 떨어진 낙엽이 예뻤다. 평소 구두를 신지 않던 내가 그날은 왠지 구두를 신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남겨줄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날이 제법 추운 날 짧은 치마에 높은 구두를 신어 걷는 게 불편했던 나를 걷는 내내 신경 써줬다. 얼마 만에 나란히 걸었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아주 오랜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 사람은 걷는 게 불편했던 내게 기댈 수 있게 속도를 맞춰줬던 것 같다.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는 2층 피자집에서 우리는 어색한 대화와 어색한 웃음이 오가는 아주아주 어색한 식사를 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주고받고, 대충 식사를 마치자마자 건너편 스타벅스로 향했다. 그 사람은 자리를 잡자마자 짧은 치마를 입은 내게 자신의 외투를 건네 덮어주고, 커피를 주문해서 가지고 왔다. 주문할 때 한마디 하더라. 늘 먹던 그거 맞냐고.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서로의 취향에 대해선 모르는 바가 없었다. 커피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우리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헤어지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어진 게 아니라는 사람. 그 사람을 앞에 두고 한참을 울었다. 나 역시도 헤어짐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한참 얘기를 나누고, 우리는 함께 서울역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포옹을 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자고. 그동안 참 많이 고마웠다고.


마지막 안녕은 따뜻한 그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내내 따뜻했던 우리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이었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별하는 법을 몰랐고, 조금 치사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따뜻하고 깔끔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별을 인정하고 확신하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오래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이 그 사람에겐 마지막이 아니라 쉼표였다고 했으니까. 자신의 결혼식이 있기 얼마 전까지 연락이 왔었던 것 같다. 자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참 아팠다.


내가 한 이별 중에 가장 예뻤던 장면인 것 같다. 후에 연락 온 것 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 날. 그날의 그 거리와, 그날의 온도. 그날 함께 했던 장소. 그리고 마지막 인사까지. 정말 누가 봐도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이런 이별을 내가 겪을 일이 있을까. 아마도 앞으로는 이별을 할 일 따위는 애초에 만들지 않겠지. 사람과의 관계에 지칠 대로 지친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확률이 내가 이별을 다시 경험할 확률보다도 아마 더 낮을 것 같다.


그냥 어쩌다 보니 어떤 이의 이별 이야기를 보고, 다시 이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아마도 그날의 온도와 지금의 온도가 비슷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장면을 기억하는 일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어쨌든 억지로 지우려 한다고 지워질 장면도 아니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엔 강렬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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