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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과점 Nov 14. 2024

오늘의 시 /  흙이 되어 있었다






씨앗을 심었다.

화려한 장미꽃 한 송이를 갖기 위해서.

씨앗을 심은 후

나는 날마다 쉼 없이 흙을 바라보았다.

물도 주었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씨앗은 좀처럼 싹을 틔우지 않았다.

점차 싹이 없는 텅 빈 흙을

바라보는 날들이 늘어났다.

나는 끝내 기다리다 지쳐버렸고

결국 장미는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얼마 안 가 흙속에서 말라죽었다.

내게는 메마른 흙만 남았다.




또 씨앗을 심었다.

멀리 있어도 잔향에 취하는

백합꽃 한 송이를 갖기 위해서.

씨앗을 심은 후

나는 또다시 매일 흙을 지켜보았다.

물도 주었다.

나의 겨울이 씨앗을 얼어 죽게 할까 봐

온몸으로 감싸주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씨앗은 뿌리가 되어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싹이 없는

텅 빈 흙만을 바라보는 날들에 지쳐갔다.

백합은 결국 한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흙 속에서 썩어버렸다.



내게 계절은 계속 찾아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다.

나의 흙 속에서 많은 씨앗들이

심어졌다가 죽어갔고 썩어갔다.

그러나 흙은 남아 점점 단단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씨앗 하나가 싹을 틔워냈다.

나의 흙이 비로소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었다.

나는 이제 장미꽃도 백합꽃도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어느덧 흙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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