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에 건강 검진을 했다. 3년 만이다. 건강검진 센터는 시내에 있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35분 정도 걸린다. 젊을 때는 친구들과 시내에서 자주 만나 놀았다. 이제 친구들은 멀리 있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는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시내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 검진도 싫고 멀리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나가는 것도 싫었다. 가기 싫은 마음을 돌리려고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검진을 마치고 시내 맛집에서 라자냐를 먹기로 했다. 라자냐, 좋아한다. 오븐이 없어서 집에서는 그 맛을 내기 힘들다. 라자냐 먹을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검진이 싫으니까. 생각하면 더 힘드니까...
아침 6시 20분 버스를 탄다. 버스 안이 조용하다. 접수는 7시부터이다. 센터에 도착하니 7시 조금 넘었다. 세상에나... 번호표가 146번이다. 대기 인원은 40명이 넘는다. 기다리면서 폰으로 마음건강검진표를 작성했다. 한참을 더 기다렸다. 내 이름이 불렸다. 벌떡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채혈부터 시작한다. 채혈하면서 약간 어지러웠다. 저혈압이라서 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뽑고 있으니 현기증이 난다. 검진 중에 가장 싫은 것은 유방 촬영이다. 이리저리 가슴을 누르면서 4장이나 찍어야 된다. 유방 촬영도 마치고 복부초음파 검사도 마쳤다. 위장 조영 촬영도 했다. 조영 촬영할 때는 흰색 가루를 물에 타서 먹는다. 그게 맛이 고약하고 트림도 나온다. 배를 꾹꾹 눌러대니 더 불편했다. 온몸 여러 군데를 검사했다. 검사할 때마다 아... 무섭다. 병 걸렸다고 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한다. 여러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똑같이 노란색 가운을 입고 이 방 저 방 불려 다니면 왠지 '자... 이제부터 환자입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불안과 두려움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진 내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 꼭 사야 하는 핸드 블렌더 검색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딴짓을 하느라 바빠서 걱정을 안 했으니 이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았다. 아이들이 게임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 11시 30분이었다. 햇살이 맑았다. 투명한 구슬 같은 햇살이 하늘에서 반짝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파스타집은 검진 센터에서 길을 건너기만 하면 된다. 금방 가게 앞에 도착했다. 오픈은 12시부터였다. 가게 앞 길은 유럽 도시처럼 자그맣게 잘린 돌 블록을 깔아놓았다. 걷기에 좋은 바닥이다. 날씨도 화창하다. 골목을 따라 문이 닫힌 가게들을 구경한다. 시내의 오전은 조용하다. 어젯밤 늦게까지 북적거렸을 것이다. 인적이 없는 번화가를 걷는다.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간다. 바람도 지나간다. 외국 쇼핑 거리에 와 있는 것 같다. 기분이 달 뜬다. 한 바퀴를 걷고 나니 공원 근처였다. 그 앞에 스물몇 살 시절 자주 가던 김밥 집이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훅 풍긴다. 라자냐 말고 김밥 먹을까, 식탐이 일어난다. 아... 참자, 공원에서는 바이올린 곡이 흘러나온다. 많이 들어본 곡인데 제목은 모르겠다. 가을에는 악기 소리가 맑고 곱게 들린다. 나무 사이에 몸을 앉히고 한참을 들었다.
파스타집 앞으로 걸어갔다. 예약한 사람들이 세 그룹이나 서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좋아하는 갈색 듀라렉스물잔이 정겹다. 라자냐와 맥주를 시키고 피자는 포장해달라고 했다. 포장은 안된다고 하신다. 안타깝다. 저녁에 먹을려고 했는데. 호가든 병맥주에 냅킨이 예쁘게 말려져 나온다. 물을 쪽 한 잔 들이켜고 맥주를 마신다. 위장 조양 촬영 때 먹은 약이 다시 식도로 올라오는 것 같다. 맥주로 달래 본다. 시원하다. 낮부터 맥주라니, 어디 베트남 해변에 와 있는 것 같다. 검진을 마친 나에게 신의 선물 맥주를 선사한다. 오븐에서 금방 나온 뜨거운 라자냐도 나온다. 얇은 라자냐 반죽이 고기와 토마토소스 사이에 있다. 서양 수제비 같다. 밀은 우리나라에서 멸치 다시물을 넣은 수제비가 되었고 서양에서는 토마토소스와 라자냐가 된 것 같다. 호가든에도 밀이 들어간다. 길쭉하게 동그란 접시에 나온 라자냐를 세로 방향으로 잘라 야금야금 먹는다. 토마토와 밀이 입안에 가득하다.
몇 년 전 자궁에 작은 수술을 해야 된다는 결과를 들은 날에도 여기서 라자냐를 먹었었다. 그날은 많이 슬펐다. 왜... 이러냐... 생각한 것 같다. 잊고 있었는데 라자냐와 함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 맥주는 못 먹었다.
그래... 그랬구나... 잘 지나왔어... 수고했다. 야...
오늘은 맥주를 즐겨...
- 가을이 물드는 9월말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