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지뜰' 구례 농촌유학 이야기 7편
어릴 적 출출한 여름밤이면 엄마는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주셨다. 하얗고 포슬포슬한 감자와 달콤한 향기가 나는 고소한 옥수수를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비 예보를 앞둔 날, 집 앞 밭에서 감자 수확이 한창이었다. 외발 수레 한가득 탐스럽게 쌓여 있는 감자를 구경하고 있는데, 앞집 할아버지께서 저벅저벅 걸어오시더니 ‘툭-’ 하고 감자 한 자루를 건네주셨다.
한 봉지도 아닌 한 자루다. 이웃 엄마들과 나눠 먹겠다고 감사 인사를 한 뒤 자루를 들어 보니 꽤 무거웠다. 양손으로 자루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자루를 열어 보니 동글동글 하지 감자가 등을 맞대고 있었다. 비가 오면 감자가 상할 수 있어 장마가 오기 전 음력 5월 경 하지즈음 수확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지 감자’다.
방금 땅에서 캔 감자는 마트에서 보는 건조한 감자와 확연히 달랐다. 감자를 물로 흙을 씻어내니 뽀얀 얼굴을 드러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감자 삶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껍질을 벗겨 감자가 잠길 정도로 물을 넣고 끓이다가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어느 정도 익었으면 물을 버리고 뜸을 들이면 된다고 하셨다.
엄마의 방법으로 감자를 삶아 보니 정말 어릴 때 먹던 하얀 가루가 나오는 감자가 되었다. 평소에 감자를 안 먹던 아이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그 자리에서 세 개나 먹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사실, 농촌 유학을 막 왔을 때 집 앞 밭을 지나면서 인상을 찌푸렸었다. 어떨 때는 코를 막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뭘 심길래 저렇게 많은 퇴비를 주고 섞고를 반복하는 걸까?’
알고 보니 이렇게 실한 감자를 키우기 위해서 근 한 달을 아침저녁으로 흙을 비옥하게 만들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드니, 순간 냄새난다며 불평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감자를 받고 신나게 삶아 먹는 내 모습이 얼마나 간사한지!
이후로도 어르신께서는 수확한 빨간 감자를 이번에는 더 큰 자루 가득 나눠 주셨다. 언뜻 고구마처럼 생긴 빨간 감자는 삶아 먹으니 하얀 감자보다 더 달고 고소했다.
감자는 꽃이 피고 줄기와 잎이 모두 푹 쓰러져야 캘 수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감자는 그때부터 알이 굵어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농촌유학이 시작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저 밭의 감자 줄기처럼 모든 힘을 빼고 쓰러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출산휴가에 이은 육아 휴직 1년을 제외하고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일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온전한 휴식을 취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렇게 쉬고 싶어서 어렵게 얻은 시간인데, ‘휴식’도 쉽지만은 않았다. 농촌 유학을 온 나의 개인적인 목표는 몸과 마음의 휴식과 회복이었다.
개학 후 한동안은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불현듯 내가 목표했던 휴식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생산성을 높이고 일명 ‘갓 생’을 위한 방법들은 공유되지만 '제대로 된 휴식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충분한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몸과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을까? 때로는 ‘제대로 쉬어야 한다’ 생각조차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나는 정말 잘 쉴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조차 3개월이 지나니 슬슬 일 생각이 나는 거 보면 정말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 보기로 했다. 무엇을 해야겠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 그래도 괜찮을까?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그래서 6월 한 달은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글도 안 쓰고 일부러 운동이나 일정을 만들지 않고 지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채의식 없는 시간을 보내니 저절로 책에 손이 갔다. 읽을수록 재미있고 더 읽고 싶다는 흥미가 느껴졌다. 평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 못한 책과 글쓰기를 하는 것이 나의 내면에 힘을 주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농촌 유학을 오면 마음껏 책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정답이었다. 막상 내려와 보니 이곳에서도 이런저런 일정들로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면 할수록 나에게 힘이 되는 휴식의 방법을 꼭 찾고 이어 나가길 바란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정신과 몸이 피곤한 나날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꼭 제대로 된 휴식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 자란 감자 줄기처럼 푹 쓰러져 보자. 보이지는 않지만, 내 안에 무언가 영글어 가는 것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