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칠 영(映), 그림 화(畵)라는 의미에 영화라는 건 하나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새 하얀 도화지에 그려질 대로 그려진 것은 적어도 몇 시간의 영상을 종이 한 장으로 압축시킨 것이었고, 그 아래 적혀있던 글은 그 종이를 설명하는 해설과 같았다. 마치 포스터나 예고편에 나오는 문구들. 보려고 하면 보이지만, 보려고 하지 않으면 전혀 안 보이는 것들.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라는 의미는 사랑이란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리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라는 의미는 아직 만날 수 없지만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라는 의미는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전에 예의 차 물어본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 나 같은 사람이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 결국 보이지 않는 사랑도 사랑이었고 오히려 그게 더 사랑 같다고 말하는 것. 심장을 쿵, 하게 만든 이것들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사람마다 고유한 마음이 있어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 나는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서 그녀가 옛 여인의 목걸이를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너는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던 그녀에게 꽃을 주는 장면이 가장 좋다고 했다. 나는 미련을 버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고, 너는 단지 사랑이 막 시작되는 모습에 감동받은 것뿐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클래식을 좋아했는데 우연찮게 그 두 장면 모두 캐논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내 장면에는 바이올린 소리가, 네 장면은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장면들에 같은 음악이 흘렀다는 것은 사랑이란 결코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것과 네가 사랑하는 것이 다르듯 말이다.
너는 유독 사랑이 묻어있는 영화를 좋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조 블랙의 사랑을 보여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같이 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내 옆에 있는 너에게 계속 눈이 갔던 것 같다. 나는 조 블랙이라는 남자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 여자를 놓아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너는 오히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힘겨워했다. ‘사랑하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던 나였음에도 사실은 그 둘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바랐다. 결말을 알면서도 왜 늘 마음이 저리고 아려왔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 울고 있던 너의 눈물을 닦아줬다. 조 블랙이 아닌 너를 더 오래 본 것만 같았고 너는 아마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도 사랑을 느껴버린 것 같았다. 같은 영화를 보는데도 왜 다른 마음이 든 것이냐 묻는다면 역시나 사람마다 고유한 마음이 있어서. 나는 그 영화를 떠올리면 가끔 네 생각이 나는데 너는 그때 네 옆에 있던 내가 생각이 날까. 내가 네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너는 간직하고 있을까.
영화가 상영되는 중 저 멀리서 타닥타닥 익어가는 마음의 한 결. 혼자 본다면 혼자 보는 대로, 같이 본다면 같이 보는 대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입니다'라는 문구가 없지만 오히려 실화라고 생각했던 마음. 그렇지 않다면 한낱 상상에 불과한다는 마음이 들까 봐, 그래서 공포영화도 무섭지 않다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무서워서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 반대로 사랑이야기라면 오히려 실화이길 바라는 것이며 시간이 지나 그것을 다시 떠올렸을 때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 그때 느꼈던 감정이 잠시나마 되돌아오는 것. 감동적인 장면에 창문 밖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린다던가 이별하는 장면에 쏟아지는 소나기에 흠뻑 젖은 것만 같았고, 감기에 걸린 것 마냥 축 처진 마음에 이 소나기의 이름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마치 사랑 혹은 추억일 것만 같은 것. 무엇이든 하나를 담더라도 그 결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을 때, 담기는 순간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는 것이 바로 사람 마음이다.
'인생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게 딱히 없었다. 기억에 남았거나 인상이 깊었던 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인생영화라는 건 아주 긴 장편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일류 영화여도 상관없겠고 삼류 영화라도 상관없겠다. 단지 누구 한 명쯤은 평생 그것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줄거리를 어느 정도 알면서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계속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고 나라는 사람도 누군가의 인생영화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고 반대로 자극적이지 않아도 여운이 있거나 잔잔하게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봄에서 겨울을 지나 다시 그 봄이 돌아왔을 때도 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영화. 결말을 알 수 없어 예고편이 없는 영화. 엔딩크레딧에 올라오는 주연의 이름이 오직 둘 뿐인 영화. 영화의 의미가 한 장의 그림과 같았다고 내 마음을 통째로 보여주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