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같은 일주일을 보내는 가장 멋진 방법
6학년 담임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수년 전 마지막으로 맡았던 6학년의 트라우마를 씻어내라는 운명의 서곡이라 생각하자. 자, 자, 어느 것을 먼저 해보려느냐. 교실 이사 20년 차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여 12개의 이사 박스부터 가뿐히 2층에서 4층으로 영차영차 옮겼다. 짐 쌀 때 책으로만 이사 박스 채운 나 손 들어. 두 손 바짝 들어. 세상에 이런 돌덩이가 있담. 홈필라테스로 다져지다만 단전의 힘으로 들어 올려 간신히 옮겼다. 어휴. 복근 만세!
교실 다 거기서 거기. 그대로 착착 쌌으니 다시 착착 꺼내 넣으면 되는...되어야 하는데... 뭘까 이거. 시공간이 변한 건가? 그 자리에서 꺼냈는데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마법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래. 당황하지 말자. 새 학교에 왔다 생각하고 그냥 새 기분으로 교구를 넣는 거야! 긍정만이 내 살길 아니겠어? 그렇게 나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지끈지끈한 머리로 교구를 장에 가지런히 정리해 나갔다.
까똑!
점심이 왔다. 일단 먹자.
보자.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렉 걸린 듯 멍청히 서서 흐름이 끊긴 끝을 찾는다. 아, 작은 교구들을 정리할 차례다. 크기가 작은 것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 두면 지저분해 보이므로 문이 달린 장 안에 차곡차곡 테트리스를 하듯 정리한다. 테트리스는 무척 신중해야 한다. 자칫 잘못 쌓으면 하나를 꺼내기 위해 전부를 끄집어내는 참사가 벌어진다. 성질머리가 한 단계 더러워지는 건 덤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게임의 엔딩을 본 듯 사물함 교구 정리도 끝이 났다.
이제 끝이냐고? 훗! 앞뒤 게시판은 지금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저리 우중충하고 꾀죄죄한데 저 위에 꽃 몇 개 붙인 들 꽃밭이 되겠냔 말이다. 내가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이 따위일 순 없다! 사비로 현수막 주문. 잘 쓰면, 아이들이 잘 협조하면 몇 년은 쓸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도닥인다. 가로세로 각각 1.2m인 앞 게시판 두 쪽은 껌이다. 장구핀으로 왼쪽과 오른쪽 모서리를 우선 고정한 후 스템플러로 고정하고 장구핀을 제거하면 된다. 일 년 뒤 철거가 번거롭고 잔잔바리 폐기물이 나오는 게 좀 그렇지만 장구핀은 짱구 같은 머리가 툭 튀어나와 있어 자칫 명랑한 아이가 꽝 하고 머리를 박을 수 있어 위험하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자, 이제 뒷게시판이 남았다. 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같은 공간을 보라! 가로길이 5m가 넘는 긴 현수막을 구겨짐 없이 짜글댐 없이 그리고 삐뚤어짐 없이 붙여야 한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철저히 고독하게 혼자 진행된다. 각자 자기 교실과 씨름하고 있는 동학년 샘들을 이런 일로 부를 순 없다. 경력이 있지! 장구핀 다섯 개를 야무지게 챙긴 후 말린 현수막을 살살 조금씩 펼치며 장구핀을 꼽아간다. 아, 드디어 마지막! 끝이 보인다. 그러나 위기 없는 드라마 없듯 일이 이리 순순히 끝날 리가 없다. 삐뚤다. 게다가 제작한 현수막은 게시판보다 무려 5cm가량이 짧. 다. 다시 철거. 일 년 내내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할 것이므로 망설이고 자시고가 없다. 신중하게 왼쪽 오른쪽 공평하게 2.5cm 들여서 뒷 게시판에 현수막 달기를 끝냈다.
요것만, 이것까지만, 오줌까지 참아가며 바지런을 떨었는데도 퇴근시간을 훌쩍 넘어 얼추 7시. 교실 출입문에 <이쪽으로 열어요>와 <Manners makes man.>도 붙여야 하고 책걸상 높이도 맞춰야 하고 에 또, 아이들 이름표 출력해 코팅도 해야 하고, 신발장에 이 빠진 번호도 붙여야 하는데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컴퓨터 앞에 앉아 주간학습안내를 짜고 수업 준비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올해는 기필코 칼퇴근을 하며 워라밸을 지키겠다고 야무지게 맘먹었는데,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거 뭔가 불안하다 진짜.
해도 퇴근을 했다. 학교 기사님은 일찌감치 복도 불을 끄셨고 깜깜한 복도엔 학교괴담처럼 소화전의 빨간 불만 눈을 희번뜩거리고 있다. 그만 가자.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고 내일은 분명 교실 환경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면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홀짝이며 우아하게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놀려 주간학습안내를 짜면 된다.
이순신에겐 일곱 척의 거북선이 남았고
나에겐 아직 2월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집으로 옮겼던 기 500권의 책을 다시 학교로 가져와서 착한 샘에게 장기위탁을 했던 책장을 1층에서 5층으로 옮겨 정리만 하면 된다. ‘훗, 껌이네! 이것만 하고 진짜 주안(주간학습안내) 짜면 되겠네!, 이런 생각들을 교실에 두고, 난 귀신을 무서워하는 어른답게 소화전의 빨간불 쪽을 외면하며 출구를 향해 호다닥 뛰었다. 난 씩씩하고 당찬 6학년 담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