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나무 Feb 10. 2022

유년의 기억 3

-서울로!-

  

오빠와 언니는 서울 학교에 무난히 합격한 모양이었다.

오빤 휘문고등학교, 언니는 중앙여중에 합격한 후 아버지와 미리 서울에 와 있고, 나랑 동생은 엄마와 함께 3월 1일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짐들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과 나는 삶은 달걀을 먹고 신이 나서 창밖을 보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궁안’이라고 부르는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어둡고 좁은 굴 같은 집이었다. 커다란 기와지붕 아래 일정하지 않은 작은 방들을 여러 개로 쪼개서 위, 아래 다닥다닥 붙은 이상한 형태로 만들어진 집들. 다락도 아니면서 방이 반듯하지도 않고 창문도 없이 이상했다.      

그땐 몰랐지만 내가 어른이 된 후 역사 공부를 하며 이모저모 따져보니, 그곳은 궁궐에 살던 궁녀들이 늙어서 퇴출당한 후 기거하는 거처로 사용했던 작은 궁 중 하나였던 거 같다. 그런데 6.25 전쟁 후 피난민들이 무작위로 몰려들어 집들을 아무렇게나 쪼개고 덧붙이며 살았던 모양이다.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는 궁궐 문처럼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지금 그곳은 ‘롯데 캐슬’ 아파트 단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그 집에선 아주 짧게 살았었다. 동네 가운데는 넓은 공터와 우물이 있고, 콩나물 공장이 두 개, 두부 공장이 하나 있었다.     

우리 동네 밖에 또 하나의 옛 건물이 있었는데 '동묘'라고 불린 곳이다. 동묘는 임진왜란 때 관우의 혼이 나타나 조선과 명나라의 군을 도왔다 하여 ‘관우’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지금 동묘 일대는 벼룩시장이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네에 불이 난 적 있다. 우리가 그 동네 안에 있는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한 다음이었는데 그래 봤자 한 지붕 아래나 마찬가지였다. 통로는 빙 돌아 반대편 쪽에 있고 대문이랑 작은 마당도 있는 집이었다.     

불이 나면 그 동네는 몽땅 전소될 구조였지만, 다행히 콩나물 공장에서 쓰는 커다란 물 호스가 동네를 살렸다.     

불이 난 집은 우리가 전에 살았던 바로 그 집이었고, 남학생이 화상을 입었다. 병원에도 못 가는 처지였는데, 우리 엄마가 경험담을 알려줘서 소주로 계속 닦아줬더니 화상 부위가 멀쩡해졌단 얘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이 신기하다.      

새로 이사 간 집도 여러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가 제일 좋은 안채를 썼다. 방 두 개, 별도의 부엌,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넓은 마루도 있었다.     

우리 집 위 2층엔 구둣방을 하던 아저씨네 가족이 살았고, 우리 방 오른쪽 첫째 방엔 장님 아저씨와 착하고 예쁜 아줌마와 인호란 아이가 살았다. 그 옆방엔 밀주를 만들어 팔던 과부 아줌마와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우리 방 반대쪽으로도 계단이 있었는데 거기로 올라가면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그쪽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에 닭장이 있고, 닭도 몇 마리 있었다.

내가 며칠 동안 밤에 똥 누러 간 적이 있는데 엄마가 그 닭장 앞에서 빌라고 한 적이 있다.     

"밤에 누는 똥은 나 대신 네가 누렴."

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보다 조금 어렸던 인호가 이뻤던 기억, 인호 엄마가 어린 맘에도 참 착하고 고운 여자인데 아저씨가 장님이라 가엾다고 생각했었다.     

반대로 매일 머리에 술 항아리를 이고 팔러 다니던 아줌마는 무척 드세고 거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또 그 아들은 심술꾸러기라 새로 산 내 빨간색 고무신을 칼로 쭉쭉 그어 놓았던 범인이란 의심이 들었다. 딱 하루밖에 못 신었는데 못쓰게 돼서 무척 속상했다.     

내가 너무 자랑해서 미웠을까? 그 애는 나보다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전입신고를 했어도 동사무소에서 나에게 입학 통지서를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한글을 가르쳐줘서 읽고 쓰는 것도 조금 할 수 있어서 그 애 숙제를 해준 적도 있다. 내가 학생이 된 것은 1년 후 답십리에 살 때였다.     

우리 오빠는 교통비로 받은 돈을 쓰지 않고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 돈으로 오빠는 나와 동생에게 호떡을 사주곤 했다. 호떡집엔 내 또래 여자아이와 이미 처녀 같은 쌍둥이 언니들이 있었다. 언니들은 분명히 닮았지만, 한 언니는 예쁘고 똑똑했고 다른 언니는 어딘가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동네 골목에 나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술에 취해서 골목 담벼락에 몸을 부딪치며 흔들흔들 다니던 욕쟁이 할머니는 이북 사투리로,     

"이라고 저라고 어짜고 저짜고~"

하면서 욕을 내뱉곤 했다.     

아이들이 '뿌떼'라고 불렀던 아저씨는 똥을 푸는 아저씨였는데, 나중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 아저씨를 봤다. 비중이 작은 역할만 주로 맡았지만, 한참 뒤엔 '달동네 사람들'이란 드라마에선 꽤 중요한 역을 맡기도 했다.      

서울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집이 너무 작아서 그랬는지 군식구가 없었는데, 새로 이사 간 집에는 서울로 공부하러 온 오빠 친구들이며 6촌 오빠들이 드나들었고, 아예 우리와 함께 살게 된 오빠도 있었다.

그 오빠는 동네 골목대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딱지, 구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상자에 담아 오빠 뒤를 따라다니곤 했다.     

우리 아버진 그때까지 영주에 계셨었다. 가끔씩 청량리역이나 영주역에서 만나면 동생과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코와 코를 맞대고 부비는 ‘코뽀뽀’를 열심히 해줬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엔 곶감을 한 줄씩 동생과 내 머리맡에 놓아두시기도 했다.     

우린 그 집에서도 오래 살지 않았다. 1년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래서 좀 더 큰 집을 찾아 답십리로 이사를 했다.     

서울 ‘궁안’에서 산 기간은 짧았지만, 전차와 국회의원 선거, 군것질에 얽힌 이야기 등 남은 기억이 많다. 아마도 몇 년 후 다시 그 동네로 다시 이사 갔기 때문에 기억이 아주 묻혀버리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시절 사진이 없다. 

후배가 찍은 내 뒷모습을 파스텔로 그렸다.
신문에서 본 작은 조각그림이 맘에 쏙 들어와서...


작가의 이전글 유년의 기억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