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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재 Mar 21. 2023

일본과 나, 일본인과 나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08

아우슈비츠 견학이 끝나고 제2박물관인 비르케나우로 갈 참이었다. 쉬는 시간을 가진 뒤 얼마 뒤에 버스로 이동한다고 한다. 쉬는 시간 중 우연히 오시비엥침 역에서 마주친 동양인과 소소하게 담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치죠 요시히로. 73년생 나이의 일본인 아저씨였다. 아버지 나잇대의 어른이 혼자서 유럽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놀랍고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는 본인을 편하게 요시라고 부르라고 했다. 동양의 위계는 유럽에서만큼은 내려놓자는 그의 배려가 느껴졌다.



우리는 주로 영어로 대화를 했지만, 가끔 일본어로 단어 몇 개를 주고받았다. 일본인과 실제로 대화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아는 일본어 단어를 마구잡이로 꺼내어놓았다. 별 볼 것 없는 나의 일본어에도 불구하고 연신 이어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약간 자신감이 붙어서 그 뒤로도 몇 단어 더 재잘댔다.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비르케나우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못하는 채로 자유견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탈함이 있었지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비르케나우를 제약 없이 주욱 둘러보며 진득한 대화도 하고 견학도 맘 편히 하였다. 



우리는 어느새 절친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요시가 내게 베푼 배려로 보아 그의 서구적 본새는 우리가 동양 국가에서 만난다고 할지라도 자유분방함을 잃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센다이로 나를 초대한 요시는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차로 도시를 드라이브시켜 주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본인의 가족을 소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유럽 여행을 끝내고 곧장이라도 갈 마음이 있던 나는 그의 호의에 환색하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요시가 건넨 명함은 일본 직장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한자의 강렬한 인상이 묻어 있었다. 



강렬한 서체의 한자가 인상적인 요시의 명함. (사진: 권민재)



견학을 마친 우리는 숙소가 있는 크라쿠프(Kraków)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나눈 잔잔한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좋아하는 일본 밴드, 한국 음악에서부터 애니메이션, 영화, 음식까지 여러 주제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어 공유했다. 한 세대만큼의 나이 차이와 출신 국가의 차이에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 요시의 제안으로 맥주 한 잔 걸치러 바(bar)로 향했다. 해는 일찍이 져 깜깜한 시간대, 폴란드의 조용한 밤골목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아무 술집이나 들어갔다. 



폴란드 특산 맥주 페루아(Perła) 두 잔을 시켜 건배하며 일본의 맥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본의 4대 맥주 아사히, 삿포로, 기린, 산토리 중 삿포로를 선호한다고 한다. 아사히의 맛이 궁금했던 나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 묘사된 아사히 맥주의 맛을 물었다. 맛은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삿포로를 주로 마시겠다는 요시의 확고한 취향을 들을 수 있었다.



요시의 여행이야기는 기분 좋은 밤에 적당한 안줏거리가 되어주었다. 20대 초반, 친구의 초대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약 3주 동안 지낸 것을 처음으로, 유럽여행만 이번이 4번째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의 풍경을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진심과 함께 담아내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본인의 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내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멋지고 정열적인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현재가 나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시간여행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화적으로 너무나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게 형성된 우리나라와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위에 놓여있다. 2023년 3월,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시다 일본 총리와 만나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언론이 주목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한일 강제징용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뚜렷한 사죄 의사 표시 여부였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신문 1면에 며칠 동안 상주했을 정도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주목했는지 가늠이 될 것이다. 



윤대통령이 표방하는 외교 방향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극단적 비판 세력은 현 외교를 친일이나 매국이라는 단어로 힐난하고 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 8일 일본 국회에서 펼친 연설의 한 부분처럼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링크)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갈등이 참 많지만, 미시적으로 본다면 애정이 가는 나라이다. 어딘가 친숙한 그들의 서브컬처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부터 시작해서 팝, 영화, 드라마까지. 일본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인터넷의 발달 그리고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이루어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조성되었다.   



외교정책이 어떤 양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지 속단할 수 없다. 단지 앞으로 여러 세대를 더 살아갈 청년의 위치에서 세상의 소식에 빠릿하게 깨어있어야 하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이른바 ‘아빠 친구’ 같은 모습에 포근함을 느끼면서도 ‘선생님’ 같은 부드러운 우직함을 동시에 가진 요시였다. 센다이로 날아가 요시 상을 다시 한번 만날 기대를 마음 한 켠에 두고 우리는 ‘사요나라’를 건넸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08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reative Commons, CC)에 따른 본문의 인용을 허락합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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