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0
2년 전 11월, 동유럽의 차가운 바람과 함께 그녀를 처음 만났다. 조국이 애도에 잠긴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비보의 여파로 초췌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동유럽의 첫눈은 우리나라의 것보다 이른 시기에 찾아왔다. 매서운 바람을 뚫고 거리를 걷기에는 가진 옷가지가 충분하지 않아 겨울 겉옷을 하나 샀다. 머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몇 번 입지도 않을 겉옷을 사는 것은 낭비일까, 잠시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사랑스러운 개구리 털모자를 잊을 수 없다. 두 갈래로 땋은 그녀의 기다란 머리와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그 모자를 볼 수 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사랑스럽다'였다.
반갑게 나눈 인사와는 달리 그날의 작별인사에는 아쉬움의 무게가 유난히 무거웠다.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겠거니, 속으로 생각하며 출처 모를 그리움을 꾹 누른 채 우리가 먹고 남긴 피자박스를 건넸다. 그녀와 함께 트램에 탑승한 피자박스에는 한 조각의 김치피자와 일곱 조각만큼의 그녀를 향한 포옹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 온기를 직접 전해주지 않은 것은 잘 한 선택이었을까,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트램이 떠난 자리에는 안도의 한숨보다 그녀를 안아주지 않은 후회가 더 크게 남아있었다.
두 달 넘게 배낭여행을 하는 동안 연애를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행 중 만난 인연은 모두 스쳐 지나갈 뿐인 것이리라,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녀와 처음 문자를 주고받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대화는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뿐 그 이상 그 이하 그 무엇도 아닐 거라고.
설령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덜컥, 생겨버리더라도 내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다짐한 지 오래였다. 그녀를 향한 일방향의 호감이 불러일으킨 착각이 좋은 친구 사이를 망쳐버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정체 모를 아시아인을 위해 일일가이드가 되어주겠다고 흔쾌히 약속에 응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악수나 포옹 대신 피자박스를 받아 든 채 작별인사를 하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여름, 그날의 향수에 젖은 채 입국심사대 앞에 섰다.
심사원이 물었다.
"유럽에는 어떤 일로 방문하세요?"
지난날의 추억은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기록을 남기려 또 한 번 유럽에 발을 들였다.
이제는 여자친구가 된 그녀를 안아주기 위해.
한때 장거리 연애 결사반대를 외치던 내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정신적 교감만큼 중요한 게 육체적 교감이라고 강력하게 생각해서였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야. 장거리 연애는 그냥 제발 좀 하지 마!"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한낱 풋내기따위가 하는 말을 과연 누가 귀기울여 듣기나 했을까. 그 세 치 혀의 주인은 장거리 연애의 진짜 의미를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발단은 그랬더란다. 유럽배낭여행을 마음 먹은 아시아 출신 한 소년이 로컬을 만나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 언어교환앱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호기심에 먼저 연락을 하기도,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흔쾌히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어 그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날 아시아 소년은 동유럽 소녀로부터 귀여운 문자를 받는다.
"안녕! 내가 아직 한글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데, 네 이름을 영어로 적는 법 좀 알려줄래?"
먼저 연락을 걸어 온 소녀에게 호기심을 느낀 소년은 친절한 답변과 함께 문자를 이어간다.
"안녕? 내 이름은 Minjae라고 해. 반가워!"
"민재... 이름이 마시멜로우 디저트 같아!"
이름이 마시멜로우 디저트 같다니, 가히 사랑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의 솔직담백하고도 귀여운 말투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본인을 발견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년의 모험기에 관심을 가진 소녀는 소년을 직접 만나 자기가 사는 도시를 가이드해주기로 약속한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소년은 개구리 털모자를 쓰고 나온 소녀를 보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의 웃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더란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피자박스를 사이에 두고 작별인사를 할 즈음에 둘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 어떤 기약도 주고받지 않은 채 헤어진 그들의 공통된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풀어보려고 한다. 헤어진 날로부터 여섯 계절이 지나고 일곱 번째 계절이 찾아올 때, 그들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0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