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연착없이 정말 딱 도착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왔지만, 그래도 이코노미에서의 비행은 녹록치 않았다. 건조함이 너무 심해 입술이 다 터버렸다. 가습촉촉마스크의 행방이 궁금하다.(캐리어에도 없었고, 집에왔는데도 없다. 묘연해....)
그래도 무사히 공항 도착!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파리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공항은 파리올림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리지앵처럼 시크하고 절제된 느낌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느낌이 있었다.
특히 하늘이 너무 이뻤다. 사춘기 언니는 이미 너무 피곤하므로 하늘이고 나발이고 빨리 나가고 싶어했지만
난 2호와 사진까지 몇장 찍었다. 그렇게 하늘에 감탄하며 슉슉슉 빠르게 움직이는 무빙워크를 타고 한참을
나와 우리가족은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나) "자, 얘들아 이제 여권 꺼내"
(2호) "엄마 줬잖아?!"
(나) ".................ㅇ_ㅇ??? 무슨소리야 엄마 받은적 없는데"
……………………….(숨막힐듯한 정적)………………………..
(나) "아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빨리 찾아봐 가방"
2호 뿐 아니라 모두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등골이 오싹하다. 이런일이 나에게 생기다니. 기내용 캐리어에도 없고 어디에도 2호의 여권은 없었다.
도하공항에서 경유 비행기를 기다릴때 대기실 의자에 여권두고 칠렐레 팔렐레 돌아다니던 2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설마 거기 도하 공항에 두고온건 아니지?"
(2호) "아니야 가지고 타긴 탔어"
(1호) "엄마 비행기 탈때 다 확인하잖아. 가지고 탔겠지.하아.."
(나) "그래..일단 티켓확인은 하니까 비행기는 가지고 탔을거야. 그래야만해"(핸드폰으로 미친듯이 여권분실 사례 검색) "야야 여긴 임시여권이라도 발급받으면 되는데 영국은 못가게 생겼는데?"
(1호) (흐느낀다. 그와중에 2호는 듣지 못할정도로 개미목소리로) "쟤때문에 영국 못가게 생겼나봐...."
(캡틴) (손사래치며, 입모양으로) "그런 얘기를 왜해"
그놈에 입방정이 문제다 나도.
이미 비행기에서는 멀리 나온데다 생각보다 공항이 넓어서 나온 길로 제대로 걸어서 비행기까지 찾아가리란 보장도 없었고, 비행기가 이미 연결통로에서 떨어져 나갔을까봐도 걱정이었다. 정말이지 이런일이 나에게 생기다니. 대환장 파티다.
이런 위급 내지는 긴급상황에서 임기응변을 발휘해야하는게 나의 역할. 짧은 영어로 입국심사대에 아이가 비행기에 여권을 두고 내렸다고 하니, 입국심사대에서 떨어지란다. 그리고 다행이도 굉장히 나이스하신 나이가 지긋한 직원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근데 문제는 이분이 영어가 짧아. ㅠㅠ 나보다 짧아. ㅠㅠ
대화가 안된다. 내가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여행을 하는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잽싸게 구글 번역기를 꺼내서 타이핑해서 보여줬다. 알았단다. 비행기 티켓보여달란다.
이 신사분이 항공사쪽에 연락을 넣어주신다. 불어로 뭐라고 길게 통화를 하는데 알아들을수가 있어야지.
이 답답하고 불안한 내 마음. 그 사이 이미 내 머릿속은 최악의 경우 영국일정을 취소해야하나 프랑스에서 뭘 더 하지까지 갔다.
내 머릿속이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통화를 하는 노신사분 울랄라..울랄라..하신다.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를 불어로 선택해서 짧은 몇마디 불어를 알긴 아는데, 저거는 안좋은 상황에 나오는 감탄사 아닌가?
비행기에 없나? 우리 진짜 시작부터 망한건가? 캡틴의 모자가 불길의 징조였나?(도하에서 내릴때 기내에 모자를 두고 내렸다. 그런 성격이 아닌 사람이)
별별 생각을 다하는데, 전화를 끊더니,
아주 짧은 영어로
“여권은 찾았대. 근데 너한테 오기까지 2시간이 걸려“라고 하신다.
읭? 거기서 나오는데 2시간이나 걸릴일이야? 아무튼 찾은게 어디야. 영국 갈수 있는게 어디야. 라고 생각하며멜시보꾸. 땡큐 베리머치. 멜시보꾸를 연신 내뱉었다. 그제서야 2호는 긴장이 풀려 울음을 터뜨렸다.
사실 아이의 잘못이라기 보다 아이에게 맡길거면 잘 간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던지,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아직 그 모든것을 착착 해내기에 3학년 어렸다.
이미 나왔을 수하물도 걱정되어서 1호와 캡틴은 먼저 나갔고, 나와 2호는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기다려주신다. 한 40분정도 지났을까? 다른 공항 직원이 오셔서 여권을 받으러 갔다. 또 한참을 기다려서 결과적으로는 1시간 30분정도를 기다린 후에 여권과 재회했다.
기다리면서 지켜보는데, 얘들은 참 일은 안하고 자기들끼리 무슨 할말이 저렇게 많을까 싶을정도로 계속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자유.평등.박애인가? 우리나라였다면 아마 벌써 짤렸을 거다. ㅎ
입국심사대를 나와 1호와 캡틴과 눈물겨운 상봉 끝에 드디어 공항 밖으로 나왔다.
오마이갓. 이뻤던 하늘이 다가 아니었다. 너무 춥다. 반팔만 잔뜩 챙기고 긴팔은 몇개만 챙겼는데.
이게 왠일이여. 너무 추웠다. 추운 와중에 택시 잡는데, 그 2시간 사이에 택시 가격대가 40% 올랐다.
캡틴의 사전 계획에 따르면 우버 말고 다른 회사가 있다는데, 너무 올라서 탈수가 없었다.
결국 우버를 잡기로 했는데, 왜 하필 우리 우버만 안오는지..날씨는 추워 죽겠는데, 차는 안오고, 우버 기사는 다른 택시 승차장과 달리 이상한 출입구 쪽으로 나와 달라고 메세지를 보낸다. 젠장.
여기가 맞는거야 안맞는거야라며 우버 정차위치를 찾고 헤매이다 결국 청소하는 직원한테 우버 기사가 말한곳을 알려달라고 해서 전혀 다른 곳으로 한참을 걸어, 우여곡절 끝에 우버기사를 만났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이대로 우리가족의 첫번째 유럽여행을 망칠수는 없었다.
되도 않는 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나) "얘들아, 있잖아 옛말에 액땜했다는 말이 있어. 안좋은일이 초반에 생기면 그걸로 액땜하고 나중에는 좋은일들만 찾아온다 그말이야. 이건 액땜이야. 여권을 못찾은것도 아니고 찾았으니까 우린 액땜한거야. 이제 좋은일만 있을꺼야"
(1호) "그래 액땜? 그거 제대로 했네"
고맙다. 받아줘서 ㅠㅠ
그렇게 약 50분 가량 숙소를 향해 달렸다. 근데 이게 왠일이여. 한 30분쯤 달렸을까? 드디어 파리 시내로 입성하는데, 사랑스러운 파리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져서 마음이 몽글몽글 거리는데 갑자기 왠 비가 비가,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다.
(나) "뭐야 이건 또. 아니 분명히 10분전까지 너무 이쁘다 그랬는데 이게 뭔일이여. 장마여?"
(1호) "엄마 액땜이 아직 안끝났나봐"
(나) "하하하하하"
왠지모를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직 올림픽 행사가 안끝난건지 도로가 폐쇄된 곳이 있어서 돌아가느라 개선문을 지나가는데 시내는 시내인지 길이 막혔다. 막혀서 미안했던 건지, 공인된 택시가 아니라 요상한 곳에서 만나자고 한게 미안했던건지 갑자기 우버기사님이 너츠를 건낸다. 근데 맛이 좋았다. 이거 좋은거라고. 뭐라뭐라 하는데 리스닝이 너무 취약해서 오, 와 멜시보꾸만 연신 건넸다.
출발 일주일 전쯤 숙소를 미친듯이 서치할때 봤던
그래서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곳에 도착했다.
다행이 그 사이 비는 그쳤다. 하지만 몹시 추웠다.
거의 11월 중하순의 날씨.
우여곡절 끝에 숙소다. 메인 출입구 쪽 우체통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메인 출입구는 파리 느낌 물씬이어서 일말의 기대를 품었건만,
문을 열자마자. 역시.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숙소가 안좋을때의 장점은? 도착과 동시에 여독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고 당장 나가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ㅎㅎ 우리는 갑작스런 추위에 있는 긴팔 다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파리 감성은 숙소 문 밖으로 나오면 100% 충전이다! 거대한 에페탑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모습에 감탄해 연신 폰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벅차올라 거리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