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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and May 14. 2023

낯선 독일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떠어떠하더라'라고 싸잡아 말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 나라 인구가 얼마인데,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성으로 정의한다는 것이 마음 편치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도 '한국 사람들은 이렇다며?'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황당할 때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내 짧은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독일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 스몰 토크, 즉 잡담을 잘 나누지 않는 건 사실인 듯하다. 유럽 나라 중에서도 남쪽의 이탈리아, 스페인에선 혼자 밥을 먹고 있거나 하면 가끔 말 거는 사람들이 있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 식당 서비스나 날씨 등등으로 시작해서 외국인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등등),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도 주로 버스 기다리거나 할 때 나이 드신 분들이 종종 말을 건넨다. 또는 내가 길을 묻기 위해서 대화를 시작하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지낸 지 한 달 반이 되어가는데도 낯선 사람과 목적 없이 대화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아야 할 때를 빼고 낯선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 아니면 카페 같은 곳에서 눈이 마주치면 보통 미소를 짓기 마련인데 독일 사람들의 반 정도는 그냥 무표정을 고개를 돌려 영국과 정말 다르다고 종종 느낀다. 그렇다고 독일인들이 차가운 것도 아니다. 학교 동료, 학생들, 연구를 위해 만나는 연구 참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수다스럽고 웃긴 사람들도 많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한 것 같다. 그저 낯선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문화가 있을 뿐.


그런데 어제 낯선 아주머니가 길에서, 그냥 걸어가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상황은 이랬다. 어제는 20도가 넘는 본격적인 봄 날씨가 시작되어서 길거리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 마침 토요일 시장이 열리기도 했고, 베스트팔렌 조약 37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북적거리는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노천카페에서 맥주나 와인,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선 일상처럼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약간의 흥분도 느껴졌다. 나도 주말시장과 노천카페에서 볼 일을 모두 마친 후, 강둑길을 따라서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강을 쳐다보고 계셨는데 나는 크게 생각지 않고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어로 빠르게 나에게 뭔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에 뭐가 있다고 한 것 같았는데 단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서 일단 가리키시는 곳을 바라보니 엄청 큰 거북이(또는 자라?) 서너 마리가 반대쪽 강둑 길에 올라앉아 해를 쬐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 광경을 즐기며 지나가던 나에게도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으셨나 보다. 뭔가 신나는 반응을 보이고 싶었지만 독일어가 짧은 탓에 내 대답은 '아름다워요! 그들도 오늘 행복합니다.'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을 공유하면서 행복한 기분이 상승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봄 풍경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OLD 시청 청사


몇 년 전에 신문에서 읽었던 프린스턴 대학교의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이 떠오른다. 과연 누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는가? 인종, 교육 수준, 나이, 성별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유의미한 조건은 그들이 상황을 맞닥뜨린 순간 그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독일 사람들도 길고 추웠던 겨울이 가고 드디어 맞이한 아름다운 토요일 오후, 사람들의 마음이 노골노골해질 때, 비로소 낯선 사람과 내가 발견한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아닐지...

마음의 여유라는 건, 물론 외부적인 조건도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내 마음의 평화가 있을 때 얻지 않을까. 내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는 순간도 돌이켜보면 아침에 급할 때, 시간이 촉박할 때인 것 같다. 여유 있게 살 수 있다는 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친절해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나 역시 독일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스스로 성찰할 시간, 주변을 관찰할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지금 나의 모습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에서나 정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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