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라코알라 Feb 27. 2022

TV를 보다가 수학을 얘기하다

배움과 앎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평일에는 TV가 있어도 꺼져있는 날이 많습니다. TV를 유난히 사랑던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주말만 TV를 켜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켜오면서 자연스럽게 TV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거실에서 TV가 사라지니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글을 종종 접하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가족들과 보드게임을 하거나 그것도 시시해지면 만화책을 보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스마트폰이 생기고, 카톡의 신세계를 영접하기 전까지의 일이긴 하지만요.


저희 집 TV 채널은 딱 6개, KBS, EBS, MBC, SBS 채널뿐입니다. 케이블TV에서 인터넷TV, IPTV로 빠르게 진화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오래된 TV, 역사적인 채널들과 신의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내린 결정이기도 하지만 부모인 저에게도 드라마는 떨치기 힘든 너무나 강력한 유혹거리였거든요. 아이들의 미디어 중독만 나무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주말에만 허용됐던 TV가 그 이유인지,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나가기를 귀찮아해서가 그 이유인지명확하지 않지만 주말이면 자연스레 함께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생겼습니다. '놀면 뭐하니', '장학퀴즈', '1박2일' 그리고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입니다.

 



딸아이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짧게 핵심만 추린 영화 큐레이션 즐겨보는 편이라 큰아이와 함께 '접속, 무비월드'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개봉 예정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영화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배우 최민식이 북한에서 넘어온 최고 수학자인데 자신의 사연과 신분을 숨긴 채 상위 1%의 아이들이 다닌다는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학교의 한 학생을 가르치며 겪게 되는 스토리였습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좋은 대사가 참 많았습니다)


5분이 될까 말까 하는 소개 영상에서 딸아이가 제게 이상한 점이 있다고 얘기하네요.

(막 지나간 장면 : 배우 최민식이 한 학생에게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라고 하고, 별 의심 없이 공식에 대입해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자,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삼각형의 외접원을 그려 설명하는 장면)


칠판에 위와 비슷한 그림을 그려가며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설명 (그림 : 딸)

딸 : 엄마, 아까 막 지나간 장면에서 말야. 설명이 좀 이해가 안 돼.

나 : 뭐가? 당연하지... 난 '우와~' 그랬는데...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원의 지름인데 그게 10cm잖아. 원의 중심에서 원과 만나 직각을 이루는 꼭짓점까지의 거리는 원의 반지름니까 5cm 맞지. 그러니까 최민식이 애초에 문제가 잘못된 거라고 하잖아. (높이가 6cm가 아니고, 5cm 여야 한다는 것)

딸 : 근데 저 직각삼각형의 외접원에서 외심으로부터 직각을 이루는 꼭짓점까지의 거리가 반지름이 되려면 저건 그냥 직각삼각형이 아니라 직각이등변삼각형이어야만 높이가 반지름이 될 수 있어.

나 : 어? 외접원?? 외심???...

딸 : 그렇잖아. (그림을 그려가며) 삼각형의 높이는 한 꼭짓점에서 대변에 수직이어야 하는 거잖아. 직각삼각형은 외심의 위치가 빗면의 중점이긴 하지만 그게 반드시 높이가 될 수는 없어. 직각이등변삼각형일 때만 그게 높이가 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아까 그 장면에서 이등변 표시가 없었던 거 아니야? 설명에도 안 나오고...

나 : 글쎄~ 기억이... 잠깐만... 일단 삼각형의 외심을 찾아보자.


그렇게 해서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나오는 삼각형의 외접원과 외심을 아이와 함께 다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딸아이가 배운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짧게 휙 하고 지나간 장면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낸 것에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한 용어 엄마에게 설명하고 있어서 세 번째로 놀랐습니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지식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아는 것을 말로 설명할 때 8배 높은 학습효과가 있으며,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수(전문가)일수록 누가 들어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메타인지를 향상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말로 설명하기' 혹은 '가르치기' 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미래 인재의 핵심 역량으로 4C, 즉 협업 능력(Collaboration), 소통 능력(Communication),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창의력(Creativity)을 꼽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량들을 과연 학교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학교에서 배움을 이어가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창의력이 독창성이나 상상력만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생각이라는 것도 결국 기존의 지식과 학문을 결합하거나 응용하거나 조금 바꿔 나오는 것일 때 적합성을 띠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죠. 물론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지식을 검색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검색의 키워드는 무엇으로 할지, 어떻게 찾을지는 자신의 머릿속에 지식과 정보가 어느 정도 있을 때, 보다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신속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과 용어의 암기는 필수적인 요소 할 수 있겠죠.




한때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배움이라는 것, 앎이라는 것이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읽는 글, 내가 보는 TV, 내가 하는 그 모든 경험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학습이 곧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습에 대한 관심과 동기는 이렇게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전 06화 좋은 '공부감성'을 만들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