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전문가 소리 들으며 학부모 대상의 강의를 하고 있지만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폄하나 비하의 의도 전혀 없어요)는 말이 있듯 저 역시도 작은 딸아이와 소통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평소 말수가 많지 않고 분위기나 표정을 살피는 조심스러운 성향을 가진 탓에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제가 정성을 많이 쏟아야 했죠.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가 노력한 만큼 그럭저럭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편이었는데 딸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상황은 반전을 맞았습니다. 가족보다는 친구, TV보다는 스마트폰, 공부보다는 유튜브나 SNS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대화의 기회가 현격히 줄어든 것이죠.제가 낳고 키웠지만 딸아이가 요즘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서 저 혼자 공을 들이다가 아이 반응에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빈번해졌습니다.
저희 가족은 주로 TV를 보거나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어느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이가 진지하게 '자기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집에 올 때는 엄마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하다가도 현관문을 열고 엄마 얼굴을 보면 괜히 말하기 싫어진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이것저것 묻는 말에 예쁘게 대답해 주는 것도 싫다고 했고, 잔소리가 자기한테 필요한 말인 건 알지만 마음속에서는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라고 말하고 싶다고도 하더라고요. 솔직한 딸아이의 속마음을 듣고 나니 그동안 저 혼자 서운한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혹시 딸아이의 얼굴을 살피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했던가, 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 미리 확인하는 배려가 부족했나, 아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 적이 있던가...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무슨 얘기 끝에 "엄마는 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식사 메뉴를 빼고는 대부분의 질문에 '몰라', '그냥', '나중에' 3종 세트로 돌려 막기 하는 딸아이기에 우선 "엄마가 너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인정"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의 말을 생각해 봤습니다. 작은 아이는 엄마가 자신에 대해 뭔가 소홀한 게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알아봐 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를 가서 저도 적응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데다 강의 세팅 문제로 신경쓸 게 많아서 요즘 작은 아이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거든요. 하지만 그걸 당장 묻는다고 아이가 시원하게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몇 마디 말을 섞는 것보다는 체크리스트를 통해 확인하는 게 더 좋겠다 싶어서 아래의 질문지를 조용히 들이밀었습니다. "이거 한 번 해볼래?"
욕구강도 프로파일 (출저 : 욕구코칭)
몇 년 전에는 '어린이용'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청소년용'으로 바꾸어 체크했더니 결과가 좀 달라져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사랑의 욕구, 즐거움의 욕구가 높았다면, 중학생이 된 사춘기 딸아이는 자유의 욕구가 가장 높았으니까요. 사랑의 욕구는 여전히 높았으므로 학교에서 멘토로 활동하면서 친구의 수학 공부를 돕고 있었고, 연극제 때 쓰일 영상 편집도 도맡아 하며 스스로 사랑의 욕구를 열심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밤늦게까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끼고 친구들과 톡을 하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했던 것이죠. "빨리 자라!", "또 톡 하는 거야!!" 아마도 자유의 욕구가 한껏 높아진 딸아이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아서 하는 행동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욕구에 따라 칭찬보다는 격려와 지지가 더 유효한 아이가 있고, 관심과 인정이 마를새 없이 필요한 아이가 있습니다. 자기 평가에 대한 질문지가 얼마나 타당하고, 객관적일까 의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내 아이가 이걸 이 정도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몰랐네'하는 정도의 인지는 충분히 가능하실 거라 믿습니다. 자녀에 대한 메타인지를 높이는 도구로 한 번 활용해 보세요.
아이에게만 욕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똑같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를 건강하게 잘 표현하면 자녀와의 소통에서 문제가 생길 일은 훨씬 줄어들 텐데 간혹 저도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았다 하더라도 솔직히 표현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네요. "빨리 자라!" 대신에 "네가 건강을 해칠까 봐 걱정이 되네.", "또 톡 하는 거야!" 대신 "네가 SNS 중독이 될까봐 두려워서 그랬어." 하고 말이죠.
우리는 섬세하고 민감한 센서를 장착한 부모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센서는 자녀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작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아이가 자주 "포기할래",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지 모르겠어" 하고 얘기한다면 '낙심'했다는 뜻이니 격려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건 나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럴 땐 배우자나 가까운 사람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달라고 청해 보세요. 아이가 짜증과 저항이 많아졌다면 '존중'을 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의 대답에서 냉소와 빈정거림이 느껴진다면 내면에 '분노'와 '불신'이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작은 변화와 문제를 감지했다면, 무엇 때문에 낙심했는지, 어떤 때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지,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묻고 솔직하게 대화해 보세요.대부분은 들어주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저도 묻고 관찰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보겠습니다. 사춘기 내 아이가 멋진 어른으로 자라는 그날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