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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Apr 21. 2020

빈 백의 천사

열 번째 엽편소설

그녀가 그 만화카페의 단골이 된 것은 만화책의 보유량이나 가격, 음료나 음식의 맛이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구석에 놓인 빈 백 때문이었다. 카페를 찾는 대부분의 커플은 벌집처럼 생긴 굴로 들어가서 꽁냥 대기 바빴다. 그녀는 첫 방문부터 지금까지 그쪽 자리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지정석은 통창 끄트머리 쪽 책장 뒤에 애매하게 남은 공간에 놓인 빈 백이었다. 넓은 공간 쪽에도 창문을 바라보는 빈 백이 몇 개 더 있었지만, 그녀는 꼭 그 구석지고 애매한 1인용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만화책을 보러 오는 대부분의 손님처럼 그녀도 처음엔 만화책 몇 권을 집어오곤 했지만, 거의 보지 않고 빈 백에 누워 조용히 잠을 자거나 그녀가 따로 가져온 책을 읽곤 했다. 그녀의 독특한 점은 선호하는 자리뿐 아니라 방문하는 시간에도 있었다. 주말에 식사시간이 지난 후 시간을 보내러 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그녀는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에 불쑥 나타나거나 평일 오후 4시나 5시쯤 나타나서 대중없이 있다가 가곤 했다. 알바인 그는 남들과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자주 머무르는 그녀가 신기했다. 저 정도로 빈 백이 좋으면 이 카페에 낸 돈으로 빈 백을 열 개는 사서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카페에 비해 싸지도 않은 그 만화카페에 그녀는 최우수 고객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딱히 누구를 귀찮게 하지 않았기에 알바도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해 다른 정보를 알게 된 건 사장님의 호기심 어린 추측성 발언이었다.

“우리 매장 최우수 고객인 빈 백 손님, 괜히 말 걸거나 귀찮게 하지 마. 그분은 그냥 여기 쉬러 오는 것 같아. 아무래도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는 거나, 오는 시간으로 봐도 그렇고, 가끔 나는 소독약 냄새 같은 거 보면 요 큰길 건너편 병원 다니는 사람 같아.”

어차피 알바인 그로서는 별로 까다로운 고객이 아니니 그럴 일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니 더욱 그녀가 신기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쩐지 개인 손수건을 들고 와서 머리 닿는 부분에 살포시 받치거나, 항상 머리를 꽉 묶었다가 풀린 듯한 머리를 보면 사장님 말처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길 건너편 병원이면 월급도 많이 받을 텐데, 늘 혼자 편한 옷을 입고 여길 제집처럼 드나드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남겨둔 채, 그는 계절이 바뀔 때 알바 생활을 정리하고 카페를 먼저 떠났다.


그가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몇 개월 뒤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복학한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러 건물 사이를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소독약 냄새가 느껴지고, 그의 집 천장 조명은 아닌 것이 확실한 밝은 조명이 느껴졌다. 눈을 떴는데 왜인지 입이 바짝 말라있는데도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손을 들어 입을 만지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손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겨우 눈을 끔뻑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눈에는 그녀가 보였다. 그는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꿈에 나올 정도였나,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분, 일어나셨어요? 눈 떠보세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갑자기 이상한 기계음 같은 것들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꿈이라도 어딘지 확인하고 싶어 진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환자분, 지금 입에 관이 있어서 말씀하실 수가 없어요. 제 말 들리시면 눈 한번 깜빡여보세요.”

그녀를 몇 개월이나 봤는데도,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이렇게 길게 들어본 게 처음이었다. 그는 다시 무거운 눈을 들어 한번 깜빡였다. 그녀는 그에게 입에 있는 관을 절대 빼면 안 된다, 답답해도 조금 기다려달라고 말하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비슷한 파란색의 소독복을 입은 사람과 그의 얼굴 근처에 있는 기계를 열심히 만졌다. 점점 몸에도 감각이 돌아오면서 온 몸이 욱신거렸다. 곧 그의 엄마가 들어와 그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고, 엄마의 울음 사이로 들리는 말로 추측해보건대 그는 학교 안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에 사고가 났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팔다리가 부러진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어서 장애가 남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가 한동안 머무른 중환자실의 간호사였다. 그가 입에 있던 관을 빼고 일반 병실로 가는 날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에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파란 옷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인 그녀를 낯선 눈으로 보았다. 머리를 꽉 묶고, 걷는지 뛰는지 모를 바쁜 움직임으로 하루의 1/3을 보내는 그녀를 보며, 만화카페에서의 그녀와는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안쓰러웠다. 그녀는 그가 그 만화카페의 알바라는 것을 기억할지 궁금했지만, 그녀가 할 말이 있으면 써서 말해달라고 준 스케치북에 그런 것을 써서 물어보기엔 왠지 쑥스러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선생님, 이거 오늘 오전에 3번 자리에서 병동으로 간 환자가 선생님 전해달라고 두고 간 거예요.”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수인계를 받던 중에 편지를 전해 받았다. 그녀가 그에게 준 스케치북을 찢어서 쓴 편지였는데, 그녀가 특별히 잘해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고생시켰던 환자도 아니었기에 그녀로서는 정말 의외였다. 그것도 잠시, 그 날 그가 일반병실로 올라간 대신 새로운 환자가 밀려들어오면서 바쁜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그녀는 어둑한 하늘을 보며 피곤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다가 주머니에 그의 편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매일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봤는지, 그녀의 이름이 정확하게 쓰여 있어서 수신자를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 편지엔 그녀가 오늘 출근 전에도 누워서 책을 읽다 온 단골 카페의 이름과, 그곳에서 일했다는 그의 반가움이 묻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내일도 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다, 다음에 그 카페에서 만나면 그녀가 늘 시키던 그린티 라테를 선물하겠노라 적혀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다른 카페를 전전했다. 요즘 카페들은 예쁘긴 하지만 의자는 높고 테이블은 낮은 데다, 부드러운 소파보단 딱딱한 나무 의자나 각진 스툴을 두는 곳들이 많아 그녀가 쉴 곳이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그녀와 근무 스케줄이 다른 룸메이트와 함께 기숙사 방에 있자니 숨이 막히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는 다른 카페들은 그녀의 휴식 공간이 되지 못했다. 돈을 내고도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을 수 없으니 그녀는 매일 피로만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녀는 설마 그를 마주치기야 하겠냐는 마음으로 자기 방과도 같던 그 빈 백이 있는 만화카페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서의 그녀와 병원에서의 그녀를 모두 본 그를 다시 마주치는 것이 왠지 부끄럽기도 했고, 그가 편지에 적어놓은 것처럼 그녀가 좋은 사람이나 멋진 간호사는 아닌 것 같아서 그녀는 숨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고정석에 대한 향수가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이기고 말았다. 다행히 카운터에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늘 하던 대로 그녀의 자리에 누웠고, 통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에 그녀가 가져온 책을 펼치고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냥 해 본 말이었을 텐데, 자의식 과잉이라 생각하며 익숙한 그린티 라테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뒤편에서 빛의 색이 변해서 어두워지려는 시점에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용한 시간과 다과를 나중에 결제하는 방식인 만화카페를 나서는데, 평소보다 금액이 적게 나와서 어리둥절하게 영수증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사장님이 말했다.

“그린티 라테는 전에 일하던 친구가 빈 백의 천사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전해 달래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님은 그 친구가 찾아오거나 부담스럽게 할 일은 없을 거라 다짐하며 앞으로도 자주 오시라는 서비스로 받아달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기숙사 방으로 걸어오면서, 백의의 천사는 확실히 아니지만 빈 백의 천사라면 받을 만한 칭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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