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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Apr 16. 2020

고르곤졸라 크림 파스타와 바나나 푸딩

아홉 번째 엽편소설

카페에 서 있던 그녀는 문자를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이번 달에 이만큼이나 썼다고?’ 카드 사용 내역을 알리는 문자였다. 그녀는 스크롤을 올려가며 진짜 그녀가 쓴 것이 맞는지 내역을 확인했다. 그리고 은행 잔고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월급날 또 돈이 통장을 스쳐 사라지게 생겼다. 이번 달에는 이만큼 이상 쓰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최후의 방어선은 늘 이렇게 결제 문자를 보면서 무너지곤 했다. 쓸데없는 것을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늘 미리 계산한 것보다 쓴 돈이 큰 것이 미스터리였다. 한 달씩 월급을 받으면 카드빚을 갚고, 그다음 달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기분이었다. 이러지 말자 다짐하고 체크카드를 쓰자니 할인 혜택 때문에 자꾸 신용카드를 꺼내 들게 되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바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서 멀쩡한 회사 커피머신을 두고 근처 카페를 전전했는데, 야금야금 쓴 커피값이 오늘의 문자로 뼈아프게 다가왔다. 혼자 곰곰이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생각이나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 핸드폰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동기 언니가 금세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왠지 이런 커피값이 아깝다고 말을 꺼내면 좀생이처럼 보일까 봐 그렇게 말은 못 하고, 그저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드는 것 같아 매달 카드빚을 갚으며 사는 신세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언니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도 그렇다고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우리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은 외식비가 문제야. 해 먹고, 도시락 싸서 다니면 좀 덜 쓰지 않을까?”

“언니, 도시락은 무슨. 나 요리할 줄 몰라. 라면이나 겨우 끓여먹어.”

“배우면 되지. 요리가 뭐 별 거야? 나 예전에 횟수로 등록해 둔 요리학원 몇 번 남았는데 가볼래?”

인스타에 늘 레스토랑 같은 사진을 올리는 언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왠지 마음이 동했다. 언니는 이사를 가서 자기는 어차피 그 요리학원 갈 시간도 없다며, 그녀의 학습 욕구에 불을 질렀다. 그 학원은 칼 잡는 법, 재료 고르는 법부터 가르쳐주고 레시피는 프린트해서 주기까지 한다는 언니의 설명에 그녀는 내일 커피 한 잔에 요리학원 수강권을 따냈다.


그녀는 언젠가 엄마가 보내줬을 자취방의 앞치마, 행주, 빈 반찬통을 들고 커다란 주방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조언에 따라 한식이 아닌 양식을 가르쳐 주는 날을 골랐다. 그녀는 퇴근한 후라 피곤했지만, 금요일 저녁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아 벌써 약간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재료를 물에 씻는 사람도 있고, 멀뚱멀뚱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사람당 싱크대와 화구 하나씩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구석진 싱크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괜히 허술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을 따라 작은 쟁반에 놓인 야채들을 물에 씻고, 칼과 도마를 꺼내 두었다. 시작할 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고 까만 셰프복을 입은 선생님이 등장했다. 선생님은 그녀보다도 어려 보였는데, 셰프복을 입고 있으니 왠지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제자들을 메인 조리대 앞으로 불러 모아 A4용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오늘의 요리 두 가지를 먼저 시연한 후 실습을 한다며 설명을 하면서 요리를 시작했다. 종이에 쓰여있는 생소한 단위, 용어, 문장에 불과한 글들이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와 야무진 손을 따라 움직이면서 점점 요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불과 재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선생님이 마법사 같다고 생각했다.


메인 요리와 디저트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선생님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가 요리를 시작할 시간이 되자 그녀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파스타에 들어갈 양파, 마늘, 파슬리를 자르는데 손가락도 같이 자를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데 기척도 없이 선생님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그녀의 손이 있어야 할 자리와 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얼른 알려주고 떠나버렸다. 그녀는 오늘 메뉴에 칼을 쓰는 일이 이것밖에 없음에 감사했다. 메인 요리인 고르곤졸라 크림 파스타를 위한 파스타를 삶고, 팬에 재료를 넣고 볶다가 면을 넣고, 우유와 생크림, 치즈를 넣고 끓이는 일은 선생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럴듯한 냄새가 났다. 뿌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선생님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마지막에 불을 끄고 버터를 조금 넣어서 녹이라는 조언을 따라 파스타의 색이 완전히 그녀가 아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본 뒤에 살짝 맛을 본 그녀는 감탄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른 제자들이 디저트를 시작했는지 점검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녀도 얼른 바나나 푸딩을 위한 냄비를 꺼냈다. 냄비에 우유, 계란 노른자, 밀가루, 설탕을 넣어서 젓고, 불을 올리자 또 선생님이 다가왔다. 초보들이 하는 실수는 불 조절이라며, 이게 불이 켜진 건가 싶을 정도로 불을 줄여주고 갔다. 그녀는 늘 냄비에 든 것이 바글바글 끓을 정도로 큰 불꽃이 켜져야 요리를 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선생님의 마법처럼, 천천히 따라 하다 보니 정말 좋은 냄새가 나는 커스터드 크림이 생겨났다. 생크림을 휘핑하느라 팔이 좀 아팠지만, 결과물을 살짝 맛보니 노력의 대가로 그 정도는 지불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파스타와 푸딩을 끝마친 시간,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그릇에 예쁘게 담고 사진을 찍었지만 반찬통에 다시 담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파스타를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집에 가져가도 어차피 그녀가 먹을 테고, 다 식어서 맛이 없어지기 전에 전리품을 즐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구석 자리에서 선 채로 허겁지겁 그녀의 작품을 먹으며 왜 엄마에게 주방에 서서 먹는다고 타박했을까, 잠시 자신을 성찰했다. 그리곤 조금 많이 만든 바나나 푸딩은 조심조심 반찬통에 싸서 행복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에 돌아와 바나나 푸딩을 넣으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가 보내줬지만 다 먹지 못해서 내용물이 제 상태가 아닌 반찬통들이었다. 그녀가 직접 요리를 배우고 나니, 엄마가 애써 했을 반찬들을 먹지도 못하고 괜히 보냈다며 혼자 툴툴거렸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그런 그녀를 모를 테지만, 괜히 미안해져서 그녀는 핸드폰에서 엄마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딸. 웬일이야? 밥은 먹었어?”

“응, 엄마. 그냥, 엄마 생각나서. 나는 밥 먹었지.”

“또 어디서 시켜먹었어?”

“아니, 엄마. 오늘 내가 요리해먹었어.”

“뭐? 니가? 뭐 해 먹었는데?”

“고르곤졸라 크림 파스타랑 바나나 푸딩.”

“고르곤졸라 뭐? 파스타? 누가 해준 거 아니고?”

“으응, 해준 거 아니고 배워서 했어. 나 그거 완전 잘해.”

“… 그래? 맛은 있었어?”

“그럼. 근데 해보니까 그냥, 엄마 반찬 해서 보냈을 때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생각나서 전화했어.”

“어유, 그래. 다 먹을 때 됐지? 뭐 보내줄까?”

“아니, 됐어. 다음 주말에는 내가 내려가서 해줄게.”

“니가? 뭐 해줄라고?”

“고르곤졸라 크림 파스타랑 바나나 푸딩.”

그녀의 엄마는 ‘바나나 뭐라고?’라며 되묻다가 웃기 시작했고, 그녀는 같이 웃으며 ‘푸딩’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집에 가서 또 엄마가 기다리는 번듯한 남자 친구나 결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님에 대해 엄마를 설득은 해야겠지만, 얼른 고르곤졸라 크림 파스타와 바나나 푸딩으로 입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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