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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Apr 06. 2020

이름 없는 노트

여덟 번째 엽편소설

그 노트가 발견된 곳은 그녀의 가방 속이었다. 그녀가 학교 도서관에서 자기 책들을 가방에 쓸어 담다가 휩쓸린 것 같았다. 그 노트는 흔한 단색 표지에 이름이 없어서,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기 것으로 오해할 만했다. 어쨌든 그녀는 자기 실수로 가져온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노트를 살펴보았다. 겉에도, 안에도 이름이나 소속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날 도서관 책상에 같이 앉아있던 얼굴들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경비실 같은 데 두고 와야 하나 생각하며 노트에 쓰인 내용을 훑어보았다. 최소한 전공이라도 유추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노트의 주인은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일기 같기도 하고, 일정표가 있어 무슨 계획 같기도 했다. 글보다는 알 수 없는 그림들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단순한 그림처럼 보였지만 뭘 보고 그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림들을 보고 나니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그 노트를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트 주인의 엉뚱한 생각이 잔뜩 적혀있었다. 왜 사람은 벽으로 걸을 수 없는 걸까, 사랑은 영원한 것인가, 옆집 사람은 그럼 가까운 사람인 걸까 하는 이상하고 유치한 질문을 던지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빼곡하게 적어두었다. 그녀는 첫 글을 읽고는 철학과 학생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그 엉뚱한 말들이 끝난 뒤에는 새로운 페이지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앞에 쓰인 것과는 글씨체가 묘하게 달랐다.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적혀 있는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 같았다. 왕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악당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함께 세상의 끝까지 도망쳐서 강력한 무기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 무기를 쓰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야만 했고, 주인공은 자기와 자기 백성을 위협하는 적과 싸울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 이야기는 결말이 없이 거기서 끝났다. 유치한 이야기인데도 그녀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쉬워 노트를 뒤적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 같은 글씨체로 이어지는 글은 없었다.


그 뒤로는 여행 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등장했다. 처음 얼핏 봤던 일정표가 이 여행 일지의 일부였다. 이 내용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글씨체가 달랐다. 이 노트의 주인이 한 사람이긴 한 건지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목적을 알 수 없는 여행의 일정은 10일이었다. 비행기표를 어디에서 얼마를 줬고, 숙소는 어디인지 간단한 약도까지 그려져 있어서 그녀가 똑같이 따라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행지는 배낭여행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정표엔 뭔가를 썼다가 잔뜩 지운 흔적들이 있었다. 이어지는 여행 일지를 보니, 알 수 없는 여행객은 도착한 곳에서 풍경을 보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스스로의 계획을 즉흥적으로 바꾸고 숙소까지도 바꾸는 과감함을 보였다. 계획했던 미술관, 박물관 등의 일정은 대부분 산책, 휴식, 맛집 같은 걸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비행 일정은 그대로였는지 여행은 10일째를 마지막으로 끝내고 있었다. 그 일지는 내내 한 일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 정도로 쓰여있었는데, 마지막 날에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다시 첫날이었으면 좋겠다. 집과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굳이 쓰지 않아도, 여행객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닌 곳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용의 연속성도 없고, 주인이 누구인지는 읽을수록 알 수가 없는 이 노트는 묘하게 계속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벌써 세 종류의 다른 글을 읽느라 시간을 꽤 많이 썼는데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눈길을 끌었던 그림들이 등장했다. 그림들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 기하학적인 절벽과 무늬 사이로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서 있었다. 퍼즐 같은 그림들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등장했는데, 자세히 보니 퍼즐처럼 풀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 주인공들이 닿을 수 없는 도형 사이를 헤매며 서로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포즈가 반복되는 그림들이었다. 글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표정 없는 주인공들의 손짓이나 몸짓만으로도 그녀는 주인공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다. 그림은 여섯 페이지에 걸쳐 그려져 있었고, 그 뒤는 백지였다.

이게 다인가 싶어 노트를 몇 장 더 넘긴 그녀는 포스트잇 하나를 발견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누구인지, 감상이 어땠는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당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무엇이든 적어주세요. 당신도 작가가 되어주세요.

아이디어를 훔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누구인지 애써 찾거나 판단하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다.

이 노트를 돌려주지 않더라도 당신이 즐거웠기를 바랍니다.


원래 시험 기간에는 공부가 아닌 모든 것이 즐겁기 마련이다. 그녀는 또 어떤 엉뚱한 친구가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험기간에 열심히 이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 사람들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학생이긴 한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가방에 무겁게 들어 있는 자기 전공 책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한심한 노트에나 시간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녀는 이상하게 그 포스트잇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얼른 노트를 옆으로 밀어내고 전공 책을 펼쳤다. 영어로 된 책이었는데,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조사 외에는 모든 말들이 전문용어로 이루어져 있었고, 형형색색의 펜으로 빼곡하게 필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공을 선택하게 한 것은 성적표였지, 낭만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 보다는 ‘취직이 잘되는 과’를 줄 세워서 성적에 맞게 전공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16살부터 삶에서 낭만이나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20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자꾸 이름 없는 노트를 향했다. 포스트잇에 쓰여 있던 ‘작가’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났다. 설렜다. 이 설렘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노트를 펴고 펜을 들었다. 그녀의 글은 다른 색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숲 속 깊은 곳, 물이 맑은 계곡 옆에는 작은 사슴이 살고 있었어요. 작은 사슴은 아주 특별한 사슴이었어요. 왜냐하면 사슴은 숲 속의 다른 사슴 친구들과는 다르게 흰색이었거든요.” 그리고 옆에는 귀여운 사슴 한 마리를 그렸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는 가방을 꽉 채워서 학교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은 열람실을 둘러보고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손에는 열람실 좌석 번호표와 이름 없는 노트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책상에 조용히 노트를 올려두고 테이블을 지나쳐 걸어갔다. 누가 보고 말이라도 걸까 봐 그녀는 잔뜩 긴장했지만, 다들 그녀를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그 노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어제 밤새 노트에 시간을 투자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전공 책들을 꺼냈다. 그리고 밀린 페이지들을 펼치고 눈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잠시 지쳐서 그 노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눈을 들었을 때는 열람실 내부가 거의 다 차있었고, 노트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누가 가져갔는지 보지 못했지만, 누군가 그녀의 이야기를 읽을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 노트를 두고 온 자리를 보던 그녀는 도서관 밖으로 나와 캠퍼스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초콜릿을 까먹었다. 그녀는 오늘 집에 갈 때 스스로를 위해 노트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엔 이름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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