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엽편소설
“안녕?”
키가 작은 꼬마 아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인사를 받은 쪽도 똑같이 바닥에 앉은 신세였지만, 조용히 대답없이 꼬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꼬마는 인사를 돌려받지 못했지만, 털뭉치가 살랑거리며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보고 곁에 섰던 어른에게 물었다.
“멍멍이 쓰담쓰담 해도 돼요?”
곁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는 웃으며 먼저 살살 예쁘게 등을 쓰다듬으라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금빛이 반짝이는 황갈색의 긴 털을 꼬마는 만지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자기보다 큰 멍멍이가 손길을 허락하지 않을까봐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꼬마와 꼬마보다 커다란 몸을 가진 멍멍이와, 그보다 큰 여자 어른이 모두 앉아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이 공원 어디쯤에서 꼬마의 부모님이 보고있을 거라고 생각해 꼬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조심스럽게 멍멍이와 꼬마가 교감하는 동안, 멍멍이는 지루해졌는지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여자 어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자, 어른이 먼저 꼬마에게 통보했다.
“우리 멍멍이 친구가 이제 집에 가고 싶대. 우린 이제 가야할 것 같아.”
꼬마는 멍멍이에게선 눈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네. 친구 이제 집에 가요. 안녕.”
어른은 목줄을 살짝 당기며 멍멍이에게 집에 가자고 말했고, 금새 꼬리를 흔들며 큰 멍멍이는 어른을 따라 나섰다.
여자는 어른스럽게 멍멍이와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는데, 앞만 보는 여자와는 달리 큰 멍멍이는 자주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 본 여자는 아까 그 꼬마가 그 자리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쳐 여자는 길을 돌이켜 꼬마에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공원은 아직 밝았지만 밝고 좋은 사람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꼬마에게 얼른 다가간 여자는 이름이 뭔지,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꼬마가 아는 것은 자기 이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자는 한 손에 목줄을, 한 손에 꼬마의 손을 잡고 꼬마의 이름을 부르며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다. 심각한 여자와 달리 꼬마는 이상할 만큼 보채지도 않고 여자를 따라다녔다. 목이 금방 아파진 그녀는, 부모가 가까운 곳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파출소에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산책이 예상보다 길어졌지만, 아이를 맡기고 나면 맘 편히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았다. 하필 멍멍이가 냄새를 맡다 꼬마를 만난 곳의 공원 CCTV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그녀가 꼬마를 만난 산책에 대해 전부 진술하는 동안 꼬마는 자기 이름과 사는 곳에 대한 추상적인 묘사 외엔 말하지 못했다. 경찰들은 요 근처 동네 아이들은 왠만하면 지문이 등록되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 꼬마는 지문 등록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것도 해놓지 않았는지 얼굴 모를 꼬마의 부모에게 괜히 화가 났다. 그러는 동안 바깥은 완전히 깜깜해졌는데, 꼬마는 엄마나 아빠를 부르짖으며 울기는커녕 멍멍이와 오래 있었던 것에 대해 처음 만난 경찰관 언니 오빠들에게 자랑하느라 바빴다. 그녀는 꼬마가 울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일의 출근을 위해 이젠 돌아가고 싶었다. 경찰들이 서로 바쁘게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다 듣고나니, 피곤해 죽겠으면서도 왠지 여자는 그냥 가기가 찝찝했다. 그래도 이제 가셔도 된다는 경찰의 말에 나가려고 하는데, 또 그녀의 멍멍이가 가려고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시종일관 웃으며 상황을 즐기던 꼬마도 멍멍이가 가야한다니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여자는 꼬마를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파출소에 남아 꼬마의 부모를 함께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래, 결말을 보고 가야 발 뻗고 잠을 자지.’ 여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소임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함께 사는 커다란 털복숭이 친구를 잃어버렸다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기다려 주는 것쯤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꼬마가 멍멍이한테인지, 멍멍이와 함께 사는 여자에게인지 대상을 알 수 없는 화법으로 자기 소개는 물론, 좋아하는 과자와 TV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데 할머니가 안된다고 했다는 설명을 하다가 그래도 이제껏 본 멍멍이 중에 네가 제일 멋지고 좋다는 얘기를 이어나가는데, 파출소 문이 딸랑거리며 열렸다. 어찌나 정신없이 뛰어왔는지, 머리와 목, 등이 땀에 젖어 있고 발에 걸친 짝짝이 슬리퍼가 애처롭게 딱딱거리는 할머니가 파출소에 등장했다. 꼬마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할미’를 부르며 달려갔고, 할미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며 손녀를 품에 안았다. 할머니는 손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이제야 주변이 보이는지, 연신 허리를 숙여 주변에 선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혼자였고, 손녀도 다른 가족을 찾지 않는데다 손녀를 찾았다고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여자는 꼬마의 지문 등록을 하지 않았다며 속으로 부모를 타박한 것이 왠지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래서 여자는 할머니와 꼬마가 경찰의 안내를 따라 지문 등록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할머니, 꼬마, 멍멍이와 여자는 나란히 파출소를 나섰다. 어색함 가운데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애가 강아지만 보면 쫓아다니는데, 집에 가던 길에 순식간에 사라져서 정말 어찌나 놀랬는지. 내가 뭐라도 사례를 해야할 것 같은데, 아가씨 반찬이라도 좀 가져다주면 안 되우? 내가 줄 게 없어서…….”
말을 흐리는 할머니에게 연신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답한 여자는 집을 향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어색하게도 할머니와 꼬마도 같은 길을 따라 계속 걸어왔다. 여자의 어색함은 아는지 모르는지, 꼬마와 멍멍이는 길어진 동행길이 그저 신이 나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블록을 걷다가, 작은 횡단보도를 마주하고 드디어 이 어색한 동행도 끝이 보였다. 이제 안녕을 고하려는데, 꼬마는 하루 종일 모험을 함께 했던 친구를 두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다시 연신 미안하다며 손녀를 데려가려는데, 왠지 여자는 자식 결혼을 반대하는 못된 시어머니라도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는 내내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매주 수요일 저녁 6시 30분에 시루는 이 횡단보도 앞에서 공원으로 산책을 가는데, 너랑 꼭 같이 가고 싶대. 여섯 밤 더 자고 여기로 시루 만나러 오자. 어때?”
생각지도 못한 멍멍이 친구와의 다음 약속에 할머니 손에 끌려가던 꼬마는 여자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것처럼 시루는 꼬마와 여자 사이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기분 좋은 밤바람이 부는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시루에겐 꼬마 친구가 새로 생겼고, 꼬마에겐 멋진 털복숭이 친구와 친한 이모가 생겼다. 이모에겐 드디어 시루와 동등한 에너지를 가진 조카가 생겼고, 가끔 혼자 사는 그녀의 냉장고 사정을 궁금해하는 솜씨 좋은 동네 어른이 생겼다. 정말 멋진 수요일 저녁이었다고, 잠자리에 누워 크고 작은 세 여자와 큰 멍멍이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