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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Mar 25. 2020

치킨과 사이다

다섯 번째 엽편소설

“진심이야. 정말로 난 네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말하는 진심이 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말을 삼켰다.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과 눈빛이 너무 상반되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고,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얽혀 내보낼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좀 진정되면 연락해. 우리 그래도 아직 친구지?”

그래도 이 말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 말만큼은 꼭 해야 했다.

“아니. 나는 너랑 친구였던 적 없는데.”

울컥 쏟아지려는 뜨거운 것을 목에 쥐며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 그는 뭐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이 가득 담긴 잔으로 손을 뻗자 얼른 일어나 가버렸다. ‘울면 안 돼.’ 그녀는 온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면서도 끝까지 참았다. 깊게 숨을 마시고 뱉다가, 그녀도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녀는 남자가 테이블에 남기고 간 흰 카드를 발견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카페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내 얘기가 되다니.’ 드라마를 보다 끄는 것처럼 자기 상황을 외면하려고 그녀도 노력했지만, 해가 길어져 밝은 바깥과 맑게 핀 꽃들은 그녀가 부끄러움 속에 숨지도 못하게 했다. 하는 수 없이 조금씩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언니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참았던 모든 감정을 아이처럼 폭발시키며 우는 동안 조용히 작은 주방 겸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려줬다. 기다리는 동안 언니는 한숨을 쉬며 냉장고에 붙여 둔 치킨집 쿠폰을 세어보고 치킨을 시켰다. 하필 동생보다 일찍 들어와 동생의 수치스러운 귀가를 봐버린 대가였다. 동생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언니는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치킨보다 먼저 동생의 평화가 찾아오길 언니는 바랬지만, 치킨이 오고 나서야 동생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빨갛게 퉁퉁 부은 눈을 보여주었다.

“앉아. 식기 전에 먹어야 돼.”

“물어보지도 않아?”

“일단 먹어. 먹으면 물어볼게.”

그 순간 같이 있는 사람이 언니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심한 듯 그녀의 앞 접시에 양념 다리와 후라이드 다리를 내려놓는 언니를 보면서, 그녀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말없이 치킨을 먹다가, 그녀는 깊게 잠긴 목소리로 그가 했던 말들과 흰 카드에 쓰여 있던 날짜에 대해 말했다. 그 카드에는 3주 뒤, 그의 이름과 다른 여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언니의 눈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처음 동생을 집에 데려다주던 날부터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였다. 진심이니, 아직 친구라니 하는 단어 선택까지도 역겨웠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물이 든 잔에 손을 뻗자마자 도망 가버린 것으로 보아, 물을 뿌린 여자도 있을 것이며 동생이 유일한 피해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니의 고요한 얼굴을 보며 태풍이 되려고 켜켜이 쌓이는 구름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고, 식탁을 정리하고, 울다 지쳐 잠드는 깊은 밤까지 그녀의 언니는 잠들지 못했다.


“언니, 나 할 말이 있어.”

동생이 걱정되어 일찍 퇴근한 언니에게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녀의 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나 그만두려고.”

이 말에 언니의 분노만큼이나 빠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왜? 그만둘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만둬? 너는 복수하고 싶지도 않아? 그 나쁜 인간 인사과에 찔러서라도 잘리게 하진 못할망정, 왜 네가 그만둬?”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흥분하는 언니에 비해 그녀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언니, 진짜 내가 어떻게 복수할지 생각을 해봤거든. 결혼한다는 여자한테 알려줄까, 사내 게시판에 올려볼까, 회사에서 커피라도 뿌릴까, 인터넷 여기저기 올릴까, 별 생각을 다 해봤거든. 근데 괜히 더 얽히기만 할 것 같더라고. 남들이야 사이다라고 하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보면 그건 나한텐 사이다가 아니잖아.”

자기보다도 침착한 동생을 보며, 언니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만두는 건 결국 네 손해잖아.”

“그래서 내가 깊게 생각을 해 봤거든. 근데 결국 뭐든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제일 멋진 모습으로 사는 게 최고의 복수이기도 하고, 내가 잘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거야. 사실 이번에 헤드헌터 통해서 우리 회사가 납품하는 큰 회사에 경력직으로 오퍼가 들어왔어. 이 분노로 죽기 살기로 해보려고. 무조건 지금 회사보다 상위에 있는 큰 회사로 갈 거야. 내 인생이 좀 더 멋져지는 게 내 복수야.”

언니는 잠시 조용히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래. 그래도 네가 정말 너무 힘들면, 버티려고 하지 말고 얘기해. 언니가 혼자 벌어도 너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우리 언니밖에 없다며 그녀는 뚱한 언니를 끌어안았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스스로를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그 남자를 모르는 척 회사에 다녔다. 일하는 기계처럼 지내고, 친하게 지내던 회사 사람들과도 밥을 함께 먹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퇴근한 후에도 그녀는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불쑥 언니의 말이 생각나, 내가 잘못한 것도 없이 왜 이렇게 죄인처럼 살아야 하나 화가 날 때가 있었지만 치킨 다리 두 개를 담아 주던 언니 얼굴을 떠올리며 가라앉히곤 했다. 그리고 해가 더 길어지는 계절이 오기 전에, 그녀는 웃으며 그 남자를 스쳐지나 사직서를 낼 수 있었다. 그녀가 사직서를 내는 것을 두고 직원들이 수군거리자, 그 남자는 사내 메신저로 ‘왜 그래, 나 때문이야?’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그녀의 메신저가 아니라 너털웃음을 짓는 부장에게서 들려왔다.

“A사 과장으로 간단 말이야? 잘 됐네. 우리 좀 잘 챙겨줘. 우리가 그동안 서운하게 한  건 없지?”

그가 놀라워할 틈도 없이, 부장님이 그녀를 데리고 그 앞으로 와서 말했다.

“여기 A사 과장님한테 잘 좀 해 드려. A사 계약 건은 다 이대리 담당이지?”


이번에는 그녀가 언니보다 일찍 집에 들어와 치킨을 시켰다. 그녀가 치킨을 시키는 대신, 그녀의 언니는 커다란 사이다 한 병과 맥주를 종류별로 사들고 들어왔다. 치킨이 오기 전에, 그녀보다 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나도 같이 축하할 일이 생겼어. 퇴근하고 네가 이직 준비한다고 공부하는 동안, 나도 퇴근하고 글을 써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냈는데, 당선됐어.”

대단한 말을 사이다를 까면서 덤덤하게 꺼내는 언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시나리오? 언니 중학생 때쯤 작가 되겠다고 그러더니, 이제 된 거야?”

“뭐, 이거 당선됐다고 작가로 벌어먹고 살겠어? 아직 엄마한테 말하지 마.”

“와 이 정도면 치킨을 각자 한 마리씩 시켰어야 하는 거 아냐?”

웃고 있는 자매에게 치킨이 배달되었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봉투를 열고, 양념 다리와 후라이드 다리를 언니 앞에 놓았다.

“이 다리 덕분에 내가 이직했으니까, 이제 작가님이 두 개 드셔.”

“작가님은 무슨.”

지난번 치킨과는 달리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함께 치킨이 반쯤 사라졌을 때, 그녀의 언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궁금할까 봐 말해주는 건데, 그거 그 자식 얘기 그대로야. 아는 사람은 어떤 놈인지 보면 다 알게 될 걸. 공중파 다음 시즌 드라마로 나온다던데.”

그 말을 듣고 실컷 웃던 그녀는 나무라듯 말했다.

“명예훼손이라도 걸면 어쩌려고.”

“픽션이라고 자막 넣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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