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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May 15. 2023

혼자 간 결혼10주년기념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꽤 길 것 같았던 5박6일이었는데 여운을 짙게 남긴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드디어 한국행비행기를 타야하는 아침이다. 7시30분 집합이었다. 처음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 풀고싸고했던 짐인데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짐을 싸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비에이에서 신치토세 공항까지는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중간에 점심식사도 해야하니 일찍 출발할수록 여유있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항 가는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이크를 돌려가며 그간의 소회를 나누었다.



 특별히 내 순서에서는 나와 남편에게 보내주시는 선물로 선생님들 다같이

 "결혼 10주년 축하합니다!!"하며 박수쳐주시는 영상도 찍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표출하지 못한 그리움으로 결핍되었던 정서를 충분히 채우는 시간이 되었고, 또 이렇게 축하를 많이 받은 만큼 책임감있게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잘 이어가야겠다는 다짐도  여행이었다.

  크루즈여행도, 유럽여행도 그 외의 어떤 고급의 여행도 이 기간동안엔 부럽지가 않았다. 부럽지 않은 건 지금도 마찬가지. 온 우주가 나의 여행을 돕고 우리 부부가 즐겁게 혹은 버티며 살아온 지난 10년을 축복하고 응원해주는 것 같은 충만한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퇴근시간에 임박해서 도착했지만 공항버스를 탔기 때문인지 막히지 않고 엄마와 약속한 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5박6일, 거의 일주일만에 아이들을 만난다.

 나의 마음은 이미 충만하므로 반가운 마음, 조금은 미안했던 마음을 가득담아 조심스럽게 현관 비밀번호를 띠띠.... 누르기 전에 첫째 딸 아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오열하면서.......


 "엄마~~~~ 쟤가~~~~~"


 엄마는 동생의 아가들도 봐주고 계셔서 조카 두 명도 같이 와 있었는데 장난감과 책을 가지고 놀면서 다소 깔끔한 성격을 가진 딸의 비위를 좀 건드렸나보다. 뭐 조카들도 오열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고 혼자만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아들녀석만 나를 힐끗 보더니

 "엄마, 선물 사왔어?"


 이것이 5박6일만의 첫 인사였다.


 아, 나 집에 돌아왔구나.


 남편은 이 타이밍에 맞춰서(?) 야근을 한다고 했고, 여행 후기를 말할 새도 없이 친정엄마아빠는 서둘러 조카들 옷을 입혀 나가버리셨다.


 아, 이것이 현실이지.





 아직 오열중인 아이를 달래려 캐리어를 풀어 키링과 과자들을 꺼냈고, 몇 가지는 딸의 책가방에 몰래 넣어주었다. 하아. 두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극단의 공평함이 필요한데 그 공평함의 지혜가 참 어렵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다행히 엄마가 아이들 저녁을 먹여주셔서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아이들과 선물을 뜯어보고 과자들을 먹으며 지난 5박6일간의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고, 다음 날이 딸의 생일이라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사기 위해 마트에 나갈 시간도 정했다.


 남편은 11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잘 다녀왔어?"

 "응, 너무 좋았지."

 "다행이네."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고 한참 만에 나온 남편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남편은 미우라아야코를 모르고, 그다지 알고 싶어하지 않고, 멋졌던 설경사진들 정도 보여주고는

 "자기는 어디로 여행갈 지 골랐어?"

 "나는 보스니아나 라트비아에 가고 싶거든?"

 "오, 오빠답네. 나랑 애들 세부에 있는 동안 오빠도 다녀와."

 "근데 문제가 있어."

 "왜?"

 "1월이 1년 중에 제일 춥다는데..."

 "그럼 어뜩해?"

 "5월이 날씨가 좋데."

 "그래서어...?"

 "5월은 어떨깡?"

 "흐음.... 그래, 그럼."




아름다운 결혼10주년기념 "각자"여행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 여행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다). 내 생활과 팔자, 성질과 일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나는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 문학기행과 아이들의 겨울방학을 맞아 계획한 세부한달살기를 핑계삼아 나는 1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번아웃이 오기도 했고, 조부모님이 보육은 해주실 수 있지만 교육은 어려운 것 같다는 자체적인 판단때문이었는데 일단 내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괴로운 중이었다)그 변화는 퇴사 후 돈을 벌지 못한다는 걱정과 열등감에 패배하지 못할 만큼의 내면적 기쁨이(라고 믿는)다.



 일단 오늘 하루를 살아있는 것이 중요했다. 오늘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맞이하자, 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일을 맞기로 결심하고 내일까지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 숙제이면서 압박이었다.

 내 앞에 닥친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도 별일 없길 바라며 소명이 의무로 좌천되고 그 의무마저 매너리즘이 되어 결국 퇴사를 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 누군가는 나라의 다음 스텝을 준비하며 인생의 방향을 틀고 조정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었다. 자기의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은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국 나라와 세계까지도 살리는 일인 것이다. 55살에도 시작하고 58살에도 시작한다. 할 수 있다.



 인생의 판을 흔들고 다른 판으로 옮기는 것은 지끈지끈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이 나를 우울하게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편했던가. 


내 판은 흔들리고 있고

한편으론 내가 흔들고 있기도 하다.

인생의 판을 흔들었다.

새로워지고 있다.


그래서 니 인생이 뭐가 달라졌어?


라고 묻는다면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다. 별 일이 없다. 하지만 흔들고 흔들리고 새로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 마음과 머리로 동시에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애엄마이고 동네 아줌마이며, 삼시세끼뿐 아니라 종간나세끼들을 수발하고 책을 읽어주기보단 스스로 문제집좀 풀어놓으라며 땍땍대고 조금풀면 조금이라고 땍땍 많이 풀면 많이 틀렸다고 땍땍대는 나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사는 나는 작년의 나 와는 다른 나 이며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는 나 이고 같아 보인다고 해도 분명히 다른 나이다.


당신은 못느끼겠지만 '내면의 관찰자적 시점'을 가진 나, 나 자신에 대한 타인으로서의 나는 느끼고 있다.


내 이름 앞에 나를 꾸미던 말,

내 왕년의 직업들,

사회복지사라거나 언어치료사라거나.

그렇게 꾸미는 말 없이 내 이름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지금 내게 닥친 최대의 환난(?)이지만 괜찮다고 느끼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새로워지는 중이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나의 일상과 생활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래도 순간순간 화가 나고 폭발할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회사로 보내고 한숨 돌리며 잠시 식탁에 앉았다. 밤새 눈이 왔었는지 베란다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속에 눈이 소담하게 쌓여있었다. 알람처럼 울리는 카톡소리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함께 여행했던 분 중 한 분이 지금 듣고 계시다며 단톡방에 영화 <러브레터> OST의 링크를 보내셨다. 링크를 클릭하자 너무도 익숙했던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행이 끝났구나. 그런데 여행을 끝낼 수가 없구나.







 한동안 저마다의 여행후기와 듣고 있는 음악과 소설낭독음원이 속속들이 전송되었다. 예상한 바와 같이 여행의 여운은 가시기 쉽지 않았고 크고 작게 모임이 이어졌다. 이미 최대치를 넘겨버린 행복과 감사한 마음은 미우라아야코 독서모임과 <빙점>원서읽기 강독회에 참여하기로 결심하는데에 이르렀다.


 국내에선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웠던 미우라아야코의 옛책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히라가나를 외우면 일단 원서를 읽을 수는 있다고 하여 부리나케 히라가나를 뗐다. 드문드문이지만 아이들이 왜그렇게 쉬운 영단어조차 읽지 못하는지 히라가나를 배우며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씩 더 이해하고 조금씩 더 읽으며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이 여행의 여운을 가늘고 길게 끌고 가려고 한다.


*2019년 발간된 이슬아 서평집의 제목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에서 차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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