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6일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어간다. 오전에 <미우라아야코기념문학관>에 다녀온 이후에는 관광지인 비에이에 가서 세븐스타나무, 캔과메리의 나무, 마일드세븐 등 나는 잘 모르지만 유명하다는 홋카이도의 유명한 관광지등을 돌며 사진도 찍고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날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비에이파크힐스온천호텔인데 이 근처에서 본 절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가이드님이
"바둑알 사진도 찍고 오세요."
라고 하셔서, 바둑알? 했었는데 저 물 속에 저렇게 군데군데 눈덩이가 있는 모습이 바둑알 같은 모양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이 모습은 다리 위에서 찍은건데 막상 다리 위에서는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긴 해도 사실은 상당히 아찔했다. 막 흔들릴 것 같고 떨어질 것 같고, 근데 너무나 멋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척 하면서 사진은 오천만장 찍었던 기억이다.
마지막 날 저녁엔 특별순서가 있었다. 일본에서 오랜시간 미우라아야코의 문학을 연구해온 미우라아야코기념문학관의 특별연구원의 강연이 있었다. 대학에서 근대문학을 가르치던 그는 미우라아야코의 문학에 매료되어 교수직을 자진사임하고 온 가족이 아사히가와로 이주하여 연구에 힘쓸 뿐 아니라 전국을 돌며 그의 작품을 알리는데 힘쓰고 계신 분이라고 했다.
미우라아야코는 기독교에 기반한 소설을 썼지만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소설인 <총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역사관이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소설속에 김준명이라는 한국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용서와 화해로 연대해야할 것과 군국주의와 천황제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이 소설이 발표된 후 일본 우익의 압박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림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의 첫 소설 <빙점>이 한국에서도 대대적인 히트를 기록한 만큼 한국방문의 기회가 있었지만 추진하던 중 건강상의 문제(그는 폐결핵과 척추카리에스로 13년간 병상생활을 했다) 등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방문에 대해 남편인 미우라미쓰요와 대화 중
내가 한국에 간다면 똑바로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어갈 것이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강의를 하러 오신 분 역시 이 일화를 전하며
한국에서 온 여행객인 우리에게 이렇게 큰절로 미우라아야코의 마음을 대신 전했다. 이때 나도 마음이 많이 뭉클했는데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탄성과 함께 눈물흘리시는 분들도 계셨다.
미우라아야코가 아사히신문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은 천만엔,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약 1억인데 그게 1964년에 1억이니까 지금 물가로 생각하면 20억이 넘는 돈이지 않을까 싶다. 20억도 20억이지만 일본에서 팔린 그의 책은 약 4800만부, 그리고 <빙점>등의 대표작은 해외에서도 번역출판되었으니 그가 거둬들인 수입은 실로 어마무시할 것이다.
내가 국내 유력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면?
상금이 일단 몇백만원 수준이라 미우라아야코의 경우와는 비교가 힘들겠다.
만약만약만약에 내가 메가히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어느 해에 20억이상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면, 일단 세금을 얼만큼 덜 낼 수 있을지가 제일 고민이겠지만 그 이후엔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에 집을 얻을 고민을 하지 않을까. 적당한 집을 샀다면 그 다음 단계로는 다른 부동산이나 사업장을 구상할 것이다.
하지만 미우라아야코는 달랐다. 그는 홋카이도를 떠나지 않았다. 아사히가와에서 생을 마무리했다. 둘 사이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저작권은 미우라아야코기념관이 가지고 있고, 형제간에도 이권을 두고 그 어떤 다툼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쓴 작품의 분위기와 메세지대로 그의 삶 역시 동일했다. 끝까지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았고 따뜻함을 잃지 않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도 않았다. 그런 올곧은 모습이 그의 글에도 더욱 생명력을 불어넣어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이 계속 회자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우라아야코의 작품들이 곧 미우라아야코의 삶이었던것 같다.
"내 삶이 내 유언이다"라고 했던 김약연 선생이 떠오른다.
미우라아야코는 13년간의 투병생활을 극복하고 미우라미쓰요와 결혼하여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82년 직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건초염 등으로 펜을 잡을 수 없어 미우라아야코가 구술로 전하는 것을 남편 미우라미쓰요가 받아 적는 방법으로 집필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사랑이기도 했고 연대이기도 했으며 보호자이면서 책임자인 부부.
결혼은 연애의 실패라고 누누히 생각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연애라고 실패로 있기엔 살아있어야 할 날들이 길다. 사랑보다 삶은 훨씬 길다. 특별한 사건사고가 없다면 나는 내 새끼들이 지 새끼 낳아 나에게 키워달라고 할 때까지 나는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 가늠도 안되는 길게만 보이는 시간동안 나와 남편은 실패한 연애의 자리를연민과 연대로 채워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잘 살아보겠다고 서로 고생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서로에게 연민의 감정을, 그리고 살아가야 할 날이 많으니까 헤어질 결심이 아니라면 연대를.
그의 손이 힘을 잃어 쓸 수 없다면 내가 대신 쓸 것이고, 그의 다리가 힘을 잃어 걸을 수 없다면 내가 그를 휠체어에 태워 밀어줘야 할 것이다. 미우라아야코라면 이런 감정들을 모두 '사랑'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의 문학을 사랑해서 온 여행이지만 나는 결국 인생, 종국엔 남편과 함께 살아갈 날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당겨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수십년을 작가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쓰기로, 미우라아야코 처럼.
내가 지킬 수 있는 수준, 내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좋은 글을 쓰려면 정말 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