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국가들로 구성된 서구사회에서 철학과 신학은 주제와 방법과 가치 면에서 거의 동일한 학문으로 봐도 무방하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주제는 "성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이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정치철학자가 아닌, 정치이론가로 분류한다. 그녀는 '정치철학'이라는 개념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정치철학이 뭐가 어때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계사랑 대(vs.) 세계혐오' 구도로 놓았다. 정치는 세계사랑에, 철학은 세계혐오에 대응된다. 아렌트는 간절하게, 세계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아렌트의 정치이론에서 정치라는 개념이 '철학'에 연결되고 안 되고의 여부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모여서 수행하는 활동과 혼자 수행하는 활동이 빚어내는 결정적 차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철학이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혼자 할 때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철학은 소란스러운 세상을 떠나 혼자서 특정주제에 몰두하여 논리를 따지고 세우는 작업이다.
반면 정치는 결코, 절대, 혼자서는 시도할 수 없는 활동이다. 정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감지하는 곳(정치영역)에서 시작된다. 그뿐 아니라 정치하는 동안 내내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타인의 존재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합리적으로 논리를 따지고 세우는 일 못지 않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분위기를 창출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것에 편승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학문을 '정치철학'이 아니라 '정치이론'으로 부르고 싶어했다. 그 정도로 철학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런데 어떤 아렌트 연구자들은 아렌트의 학문적 성과를 철학적 성과로 보기도 한다. 이참에 나도 (어느 쪽이냐면) 그 쪽에 속하는 사람이라 고백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왜 '철학'이라는 단어를 쓰려 하지 않았는지, 그 주장 및 근거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거기에 아렌트 정치이론의 알맹이가 놓여있는 까닭이다.
'정치는 철학이 아니다.' 이것이 아렌트가 개념정의한 정치의 첫 번째 의미다. 정치의 두 번째 의미는 정치와 '통치(痛治)'의 의미차이를 가리킨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를 통치로 이해한다. 정치나 통치나 그게 그거지 싶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제법 많다. 실제로 우리말로 보면 정치는 '다스림'의 뜻에서 멀지 않다. 왜냐면 우리말 '정치'는 한자어 政治를 읽은 것인데 그 안에 '다스릴 치'라는 글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한자어 문화권에서 정치를 언급할 때는 다스림의 의미를 많이 포함하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영어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무슨 대단한 영어는 아니고,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단어 몇 개를 놓고 비교해보려는 거다.
영어로 통치는 'rule, reign, administration, government' 등이다. 통치는 대개 '지배-피지배'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혹은 그런 관계를 조성하고 지향한다.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을 보호하고, 정부를 관할하는 일, 그것은 통치의 의미다.
한편 영어로 정치는 'politics'다. 이 단어는 'polis(발음 주의: 포울리스)'를 어원으로 한다. 폴리스는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폴리스를 가리킨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운영되던 정치공동체가 폴리스였다. 폴리스는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또 그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 단, 지배-피지배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결의를 해낼 수는 있었다.
정치는 바로 그것에 집중한다. 폴리스에서 일어났던, 거기서 주고받았던 인간의 활동.
정치가 전제하는 인간관계는 지배-피지배가 아니라 '평등'이다. 정치영역에서 평등은 매우 중요하다. 평등이 확보되지 않은 공간은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평등이 확보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의견을 꺼내놓고 견주며 토론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남들의 입을 막고 자기 의견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것과 이상한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감수성 위에서 행위(action, 정치적 삶)가 출발한다.
그런데 평등이 견지되어야 하는 정치영역에서 특정한 사람이 말을 독점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말뿐 아니라 행위에서도 더 큰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그 사람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독재자), 그 사람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광범위한 우러름과 특별한 존경이 그런 사태를 야기한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개인이 지닌 정치적 권위로 인한 결과로 보인다. 이 같은 의미의 정치적 권위자들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미국의 링컨 대통령 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을 예시할 수 있겠다.
정치영역에서 구현돼야 하는 평등은 자유와 책임을 아우른다. 만약 어린이가 자유롭게 행동하다 옆집 장독을 깼다면 그 책임은 그 어린이의 어버이가 지게 된다. 이 경우 어린이와 어버이는 평등하지 않다. 어차피 부모자녀 관계는 평등하지 않아야 한다. 좋은, 정상적인 어버이는 어린이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이 경우 어버이는 장독 피해보상금을 내며 장독 주인에게 사과하는 일을 감당한다. 어린이에겐 자유만, 어버이(성인)에겐 자유와 책임이 주어져있는 까닭이다.
어린이는 어버이의 보호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드시 천방지축이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자유롭게 행동하되 책임지지 못한다. 어린이는 어버이의 보호 아래 맘껏 뛰어놀고 맘껏 모험할 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지구상 거의 모든 사회에서 법으로 미성년자를 구분하는 이유도 이런 류의 책임을 다루는 방침과 관계가 있다.
정치영역에서는 평등관계가 실현되어야 한다. 평등의 실현과 향유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활용한다. 모두가 1/n로 자유롭게 또 책임있게 참여하는 공간이 정치영역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민주적 선거에서 학력이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생물학적 성별이 무엇이든, 지방에서 살든 수도권에 살든, 성인연령에 도달했다면 모두 1표를 행사한다. 자유롭게, 책임있게.
내가 남들보다 정치에 세 배쯤 더 관심이 있으니 투표용지를 석 장 받고 싶어요, 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보다 내 아내가 정치에 더 민감하니 내 표를 아내에게 양도하는 게 어떨까요, 라고 제안해도 될까? 그러면 안 된다. 공적 영역에서 1/n이 가리키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놓치면 안 된다. 그것은 자유의 문제, 곧 책임의 문제다.
정치를 위와 같이 개념정의하면,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될 수 있다. 또 국가의 대소사에 참여하는 것만이 정치가 아니며, 내가 속해있는 크고작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도, 시사적 이슈에 댓글을 다는 행위까지도 정치임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는 정치를 하고 싶어하며, 정치를 하는 게 인간다움의 지표가 된다는 뜻이다. 국회의원만 정치적 동물이 아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만 정치적 동물이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100% 정치적 동물들이다.
인간인 이상 나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로써 내가 정치를 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이미 확보되었다. 이제 정치를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자, 무얼 망설이는가? 당장 정치를 시작하자! 공적 영역에서 내가 표현하게 될 언어와 행위에 대한 자유·책임을 명심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