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봇이 아닙니다(I am not a robot)'는 온라인에서 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문장이라 한다. 이 문장을 체크하면 그때 그곳의 컴퓨터 사용자가 인간으로 판별된다는 거다. 이 짤막한 문장 하나가 어떻게 한 컴퓨터 사용자를 인간이라고 증명해줄 수 있는지, 그 자세한 기술적 내막에 대해선 아는 바 없지만, 로봇이 아니어야 인간인 것만은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식물이 아니며, 일반적 의미의 동물(물고기, 날짐승, 들짐승)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같지 않아서 인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길 수 있다. 다른 동물이 아니고 인간임을 입증하는 특징이나 속성, 다시 말해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가 인간다움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강형욱 훈련사가 강아지를 훈련하는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강아지가 생각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제법 있을 것이다. 강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늘 하던 행동을 중단하면 강 훈련사는 "지금 이 친구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또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강아지는 훈련의 의도를 알아챈다. 심지어 강아지는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자신의 무례한 행동(다른 말로 비사회적, 반사회적 행동)을 스스로 교정한다.
고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만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최소한 인간과 강아지가 공유하는 속성으로 볼 수 있다. 둘러보면 생각하는 동물은 강아지 말고 더 있는 것 같다. 침팬지, 돌고래 등은 물론이고, 맹수류나 맹금류 중에서 자기의 즉각적인 본능을 넘어서서 생각을 하고 상황을 고려한 다음에 행동을 신중하게 개시하는 동물들이 제법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한편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으로, 어떤 이들은 '공감하기(감정이입)'를 강조하기도 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흔히 '비인간적' 혹은 '짐승 같은'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런데, 공감을 못하는 게 짐승 같은 것일까?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닐까? 공감을 잘하는 게 짐승(동물) 같다는 생각.
찻길을 건너다 로드킬당해 다치거나 사망한 동료를 향해 울부짖는 동물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곤 한다. 그 영상들에서는 동물들의 감정이 매우 절실하게 표현되어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이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넉넉히 전달될 정도다. 그리고, 부드러운 육질의 송아지고기를 위해 어린 나이에 도살당하게 된 송아지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암소의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린 자녀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인간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동물들에게서 너무나도 자주 발견된다.
이뿐 아니다. 덫에 걸린 사자를 도와줬더니 몇 년 지나 그 사자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멀리서부터 달려와 안기는 경우도 있다. 안긴다기보다는 육중한 몸으로 사람을 덮치는 것(?!) 같지만, 사자의 동작을 보는 순간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따라서 공감력 또한, 몇몇 종의 동물들과 인간이 공유하는 속성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인간만이 지니는 인간의 고유한 인간다움이란 없을까? 아니, 있다. 아렌트는 그것을 '행위'에서 찾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에서 나오는 용어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political animal)'의 계보를 잇는 개념이다.
행위는 신체적 욕구를 표현하고 또 충족하기 위해 취하는 간단한 움직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고 붙잡거나 내려놓거나 걷거나 멈추는 등 분절되고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들은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로봇이 아닌" 인간은 특정한 동작을 취할 때, 그 동작에 의미와 의도를 담는 경우가 있다.
정치적 용어로서 'action,' 즉 행위는 타인(들)과 자신의 의도 및 결과를 따지고 헤아리고 또 내다보는 가운데 음성언어와 몸동작을 임의로(자의로) 구성해서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정치사와 인류사를 면밀히 관찰한 아렌트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 중 인간만이 그 같은 의미의 행위를 할 수 있다.
행위는 기본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각자 의견을 내놓고 찬반토론을 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각종 미디어가 발달돼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꼭 한자리에 모였을 때가 아닐지라도 타인을 염두에 두고 '행해 보이는' 모든 목적의식적 활동이 곧 행위다.
행위는 다른 포유동물들에게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열띤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지 않느냐고? 게다가 그들이 저항(어쩌면 '혁명')을 통해 자기들만의 농장을 건설하지 않느냐고? 그거, 다 의인화된 거다. 말하자면 그들은 동물답지 않다. 인간답다.
(우리는 동물들이 토론 같은 것을 즐기는지, 혁명을 하려고 하는지, '가·부'를 증명할 수 없다. 허나, 특정동물종의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회합과 저항이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례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동물들은 행위를 구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 의인화된 돼지들 조지 오웰 저/김지현 역/신한솔 그림, 문학마을 | 2017년 06월
ⓒ <동물농장> 동화책 (문학마을)
행위는 인간만이 지닌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다. 그것은 인간이 음성언어와 몸동작을, 일상적 의사소통뿐 아니라 정치적 의견표명 용도로 '상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행위에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나는 '돌이킬 수 없음'이고(irreversibility), 다른 하나는 '예측할 수 없음'이다(unpredictability). 돌이킬 수 없는 행위의 속성은 용서를 수반한다.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속성은 약속을 요구한다.
(예고편) 다음 번 글에서는 용서와 약속의 개념을 다루어볼 계획이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에서는 용서와 약속이라는 인간의 활동이 행위의 속성에 직결되어 체계화되어있다. 한 가지 기대해도 좋은 것은, 우리가 일상적·상식적 차원, 종교적 차원을 걷어내고 용서와 약속의 의미를 들여다보게 되리란 것이다. 용서·약속의 정치적 개념정의를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이야기.
어쩌다 보니 이번엔 '예고편'을 붙이게 되었다. 이 예고편은 다음 번 글에서 이야기할 주제 중 하나인 '약속'을 가볍게 선뵌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