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미 Jun 26. 2021

끝없이 용서하고, 무겁게 약속하라

행위의 돌이킬 수 없음, 용서를 일으키다



세상 모든 인간의 행위는, 일단 나타났다 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다. 하나의 행위가 나타나면 그에 대한 반응행위(reaction)가 일어나고, 그에 자극받은 또다른 반응행위가 일어나면서, 행위는 끊임없이 연속된다. 그렇게 연속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있는 행위 중에서 하나를 콕 집어 돌이킨다? 불가능하다.



일단 행위를 했는데, 아차 싶어서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을 수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라는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행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말이 보태져서 그 행위가 (오히려 단계별로, 때로는 분석적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른바 '흑역사'는 삭제가 안 된다.



헌데,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잘못된 행위를 돌이키지 못하고 없애지도 못하지만,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사과'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사과는 용서의 전제조건 같은 것으로 자주 간주된다. 사과하면 용서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아렌트가 말하는 용서는 사과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사과를 안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절대적 필수조건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뿐.)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야 한다" 가르쳤던 것에 비견될 만하다(마태복음 18:22). 일흔 번을 일곱 번? 이건 용서를 하고 또 하고, 계속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용서 앞에 사과라는 전제조건을 달지 않았다.



아렌트는 인간사회에서 용서가 필요한 근거를 종교적 심성이나 윤리적 덕망에 두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음'이라는 행위의 속성에 두었다. 즉 인간의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행위들을 용서라는 방법을 통해 다루면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행위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삶으로서 행위를 시작한 사람은, 남을 용서하고 또 나도 용서받으며, 행위를 하게 된다.



이때 용서의 의미는 "그때 그곳에서 그 사람이라면 그런 행위를 할 수도 있지"하고, 시쳇말로 '쿨하게'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두둔도 아니고, 무마도 아니다. 그 행위가 그러저러하게 일어났음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정치적 장면에서 용서가 없다면, 행위를 잘못할세라 다들 몸만 사리고 있을 것이다. 가만 있으면 중간 가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지려면 용서 또한 활발해져야 한다. 단! 예외가 있다.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하려는 명분을 위해, 모든 경우에 무차별적으로 다 용서를 실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분명히 밝혀두었다. "이 용서는 극단적인 범죄나 의도적인 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예컨대 독일의 유대인대학살(홀로코스트),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같은 극단적이고 의도적인 전쟁범죄에서는 '사과, 처벌, 배상' 등이 먼저 공개적으로 나오고 뒤이어 용서가 구현되는 게 맞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경우는 보상(reward) 말고 배상(compensation)이란 단어를 써야 하리라.


 


행위의 예측할 수 없음, 약속을 부르다



행위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속성 외에 또다른 중요한 속성이 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음'이다. 우리는 오늘 만나는 낯선 사람이 나와 찬반토론을 하다가 나를 해치지 않으리란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는가?



정치이론가로서 아렌트는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인간 마음의 어두움'을 어차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건 성악설 같은 게 아니다. 어두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어두움의 핵심적 의미다.



인류역사가 수천 년(혹은, 원시인까지 포함하면 수만 년?)에 이르지만, 인간 마음의 어두움은 아직 완전히 다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수만 년이 지나도록 인간 마음의 어두움은 100% 말끔하게 공개될 수 없으리라.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같은 학식과 덕망이 드높은 학자도 신 앞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문제거리라고 고백한 바 있다(I have become a problem to myself). '내 마음 나도 몰라'의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 어딘가엔 어두운 구석이 있다. 누구한테나 있다. 그 어두움은 낱낱이 밝혀질 수 없다. 어두움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남들과 함께 공통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상대의 행위를 예측하면서) 추진하려면 일종의 인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장치, 그것이 바로 약속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유롭게, 공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우리가 다같이 정치적 삶을 삽시다, 이런 것이 곧 약속이다.



약속에는 직업정치인들이 투표일을 앞두고 내어놓는 공약은 물론이거니와, 사사로운 장면이 아닌 공적인 장면에서 인간들이 맺는 모든 종류의 계약이 다 포함된다. 그리고, 약속은 맺는 것 못지않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에서는 신뢰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뢰를 무겁게 여기는 마음 위에서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약속은 행위에 안정감을 보장해준다. 저 사람이 약속대로 행위하리란 것이 믿어지면, 덜 불안하다.



나는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왜냐면"이라는  말미에서 예고편을 올렸었다. 모름지기 예고편은, 다름 아닌 본편의 존재로 신뢰도가 입증된다.   명의 독자라 할지라도 본편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의 기다림에 반응행위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약속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 된다. 정치적 의미에서 약속은, 약속을 했다는 것으로 가치가 증명되는  아니라, 약속의 내용에 대한 책임있는 구현으로 가치가 증명된다.



정리해보기로 하자. 행위의 돌이킬 수 없는 속성 때문에 나타나게 되는 용서는 공적 영역에서 인간들이 자신감있게 행위를 펼칠 수 있도록 해준다. 정치영역에서 행위가 활발히 연속되려면 기본적으로 '용서'라는 '엔진'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공통수준으로 장착돼있어야 한다. 모두가 용서할 준비를 하고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속성 때문에 요청되는 약속은 서로의 신뢰 속에 인간들이 행위를 과감히 실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약속은 책임있는 행위를 권장하는, 무겁기 짝이 없는 활동이다.



용서와 약속은 한 사회의 정치적 품격을 드러내는 지수로 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영역에서 이 두 가지가 올바르게 발생하는지, 적합하게 수용되는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삶의 품격, 품위를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이 끝없이 용서하고 무겁게 약속하는지에 대하여 성찰하면 더더욱 좋다.


 


* 함께 읽을 책: <인간의 조건>, <책임과 판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