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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Jun 28. 2021

평등은 천부인권이 아니다



천부인권(天賦人權)의 평등사상



아렌트의 정치개념 중에 흥미로운 것들이 여럿 있다. 실은 그래서 이 연속된 글이 시작되었다. 지적(知的) 흥미로움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념을 따지다 보면 골치 아플 수 있지만, 골치 아픈 뒤에 찾아올 개운함의 맛이 훌륭하기 때문에 "같이 맛 좀 보자"는 마음이었다.

'평등' 개념은 그 맛의 정도로 따지면, 단연 상위권이다. 아렌트는 평등을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 풀이하지 않는다. 세계인권선언 첫머리에 장중하게 등장하는 천부인권과 평등 사이를 멀리멀리 태평양 너비만큼, 아니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거리만큼 떨어뜨려 놓는다.

천부인권이 아니니까 평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니다. 전혀 아니다. 아렌트는 누구보다 막중하게 평등을 다룬다. 다만 천부인권의 의미로 평등을 다루지 않을 뿐이다. 그럼 무슨 의미로 평등을 다룰까? 아렌트가 직접 사자성어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기자가 이해한 바를 따라 표현하면 '결자해지(結者解之)'다. 평등이란, 인간이 결박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해결할 수도 있는 주제란 것.
 

신의 이름으로 너를 차별하겠다? 카스트제도의 역설



관찰컨대, 천부인권 주장에는 하늘의 권위를 덧입으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God Given-Right.' 신의 권위에 편승하겠다는 당당한 의지. 신에게 저항해선 안 되듯, 평등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권위 있고 거룩하게 내포돼 있다.

카스트(caste system)라는 게 있다. 인도 혹은 네팔의 전통규범으로서 21세기에도 효력을 발휘하는 제도다. 카스트제도가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것 역시 '신(神, gods)'이다. 즉 힌두교에서 천부인권 개념의 적용은 차별적인 인권 행사를 의미한다.

                                     




 인도 카스트제도.(그림)

ⓒ wiki commons



힌두교는 신이 사람마다 깨끗함의 단계를 지정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설파한다. 깨끗함의 단계를 따라 순서대로 열거하면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다. 이에 따르면 브라만이 제일 '깨끗'하고, 수드라가 제일 '안 깨끗'하다. 그리고 너무 깨끗하지 못해서 여기에 끼지도 못하는 부류가 있다. 아웃카스트, 즉 불가촉천민(Untouchable)으로 불리는 '달리트(Dalit)'다.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두 체계는 연속되지 않는다.  



힌두교의 () 불평등을 조장하고, 거기에 근거를 부여하는 존재() 현현해 막강한 종교적 권위를 발산한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카스트에 대한 종교적 신뢰가 약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일견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종교적 믿음의 약화  혼돈은,  다른 지점에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같다. 2007년부터 계속 법안 발의만 되고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차별금지법인데도 여기에 결사반대를 다짐하는,  차별을 주장한다고  수도 있는 종교인들 얘기다.



심지어 최근 국내 감리교단이 성소수자들을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공식으로 문제 삼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목사를 공식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어 목하 '대치 중'이다). 성적소수자도 인간인데, 어찌 된 일일까? 신앙에 가까운 천부인권 정신 설득력은 신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어째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차이라 쓰지만 차별로 읽겠다는 사람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다'라고 강조한다(plurality). 인간은 평등하게 다르다는 이야기다. 누구는 장래 피겨퀸으로 태어났고(김연아), 누구는 번개 같은 속도와 쇼맨십 가득한 넉살을 갖고 태어났다(유세인 볼트/ 발음주의: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우사인' 아님). 그런 한편, 누구는 평균보다 두 배쯤 큰 손과 긴 손가락의 소유자였다(프란츠 리스트). 어떤 이는 발명 분야에서 평균치를 넘어서고(토마스 에디슨), 누구는 발견 분야에서 평균 범위를 벗어났다(존 뉴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위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신을 주어로 삼아 다시 말해보면 '신은 사람들에게 차이가 있게 하셨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차이라는 글자를 차별로 읽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어느 누가 그렇게 글자를 이상하게 읽는 걸까?



솔직히 말해, 우리는 평등이 천부인권에 기대 권위 있게 또 자연스럽게 실천되지 않는 현실을 살고 있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문에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 번지고 있다. 공권력 사용 장면에서 유독 흑인이 많이 사망하는 사례는, 미국(혹은 여타의 백인 중심사회)에서 빈번한 사건·사고들 중 하나다.



이런 류의 사건·사고가 보고될 때마다 어떤 이들은 천부인권을 감동적으로 강조한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신이 인간을 평등하게 세상에 내셨으나 인간이 그에 불복해 불평등이 나타났다고 설명하면, 또 다시 신의 뜻·권위를 해결방안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먹히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온 인류가 그런 종교적 분석과 해결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차이라 쓰고 차별로 읽(겠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평등사상



한나 아렌트의 평등사상은 바로 그 지점을 꼬집고 뒤엎는 효과를 일으킨다. 아렌트가 한 말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 <전체주의의 기원> 중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보자. 애초에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불평등으로 이해한 당사자도 인간이고, 차이를 빌미로 차등을 조장한 당사자도 인간이다. 그리하여 아렌트는 말한다.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공적으로 해결하자는 것, 아니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렌트는 결국, 선천적 혹은 후천적 차이에 서열을 매겨 불평등을 조장하며 강화하는 장본인이 인간임을 고발한다.



요컨대 아렌트의 평등사상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지향한다. 인간사회의 평등 시스템에 오류를 제공한 원인 제공자가 인간이니, 오류를 해결할 자도 인간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아렌트 평등관에 따르면, 우리는 평등을 '나'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다. 우리는 평등이 '개인'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문제란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평등을 다뤄야 한다.



즉, 평등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공론화돼야 한다. "또야?"하면서 지겨워하지도 말고, "답이 없네"하며 지루해하지도 말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십 년 넘도록 펼쳐온 지난한 노력이 이제쯤은 열매를 맺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함께 읽을 책: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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