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과 공공성은 둘 다 '공(公)'으로 시작하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영어로 공익은 public interest 혹은 public good, 공공성은 publicity일 것이다. 공익과 공공성은 굳이 따져 묻지 않으면 대략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장수하늘소와 장수풍뎅이가 같은 '장수'로 시작하는데도 심지어 과(科, family)가 다르듯, 같은 '공'으로 시작하는 공익과 공공성도 썩 다르다. 예상했겠지만,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 역시 이 두 단어를 섬세하게 구별했다.
공익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 즉 사익추구자에 대해서 우리는 대체로 좋지 않은 인상을 품는다. 공익추구자는 사익추구자보다 훌륭할 수 있고, 실제로도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런데 공익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독일 나치 집권 시대에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히틀러 치하에서 군비 장관을 맡았었다. 그는 건축이라는 공통관심 때문에 "히틀러의 친구"를 자처했고 히틀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와의 친분 때문에 나치 정부에 등용되었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히틀러 개인보다는 독일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이익 즉 공익을 위해 일했다.
그는 독일의 승리를 위해 효율적 무기생산 산업구조를 고민했다. 고민을 열심히 하느라 하마터면 과로사할 뻔했다. 실제로 병원에서 업무를 본 적도 있다. 전쟁 직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슈페어는 '착한 나치(good Nazi)'라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묘사했다. 변호했다.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그는 히틀러의 최측근이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U보트'로 유명한 독일 해군제독이자, 히틀러가 자기 후계자로 직접 지명한 카를 되니츠(Karl Dönitz)도 말하자면 공익추구자였다. 그는 심지어 슈페어보다도 낮은 형량을 받았다(10년형). 되니츠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정에서 재판받을 때는, 연합군 측 장성들이 앞다퉈 나서서 그를 변호해주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단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국가를 위해, 즉 공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므로 그것이 정상 참작돼야 한다는 이구동성이었다.
공익은 공동체의 이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때 말하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 간 이익이 상충할 때 A 공동체의 이익 추구는 B 공동체의 피해와 손상을 구성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있어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지만, 일본에는 '반역자'다. 이런 건, 공익의 이면(the dark side?)이라 하기도 뭣하다. 그냥 공익의 특징일 뿐이다.
공공성을 이해하기 위해 아렌트는 칸트(E. Kant)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렌트는 칸트의 정치철학을 강의하면서, 칸트에게서 공공성 개념을 뽑아내어 강조한다.
공공성(publicity)의 기초적 특징은 칸트적 개념 '냉담하다(indifferent), 무관심하다(disinterested)'에 잇대어있다. 또 공공성은 공정성과 깊이 관계 맺는다. 공정성은 비부분성(impartiality)를 지향한다. 공정성은 부분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 공공성과 공정성은 전체를 본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사익에도 무관심하고, 공익에도 무관심한 지점을 표방한다. 요컨대 이익에 무관심한 것.
그리고 공공성은 '나의 사유(thinking)의 방식'과 큰 관계가 있다. 나 혼자 사유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유할 것인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 따르면, 칸트는 공공성을 말할 때, 사유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를 주장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칸트가 말한 정치적 자유는 공공성에 연결되며, "자신의 이성을 모든 면에서 공적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고.
칸트의 정치철학에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세상, 제일' 중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공공성은 공익에 대조된다. 거의 반(反)한다. 특정한 공익을 괘념치 않는다.
공공성은 공익이든 사익이든 이익에 거리를 두고자 한다. 공공성은 정치적 삶을 사는 행위자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이야기다. 자유와 책임이 같이 있는 게 공공성이다.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검토받는다는 것이 공공성의 기초다. 밀실정치, 파벌정치, 야합정치, 이런 건 공공성을 저해한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로 공공성을 엄밀하게 개념 정의하면, 공공성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목격하기가 왜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납득되고도 남는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개적인 검토를 받겠다며 자기 생각을 기꺼이 공적 영역에 내어놓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는 무척 드물다. 자기 생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 앞에서 우리는 주로 다음과 같이 행동하기 바쁘다.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반복하거나, 반발하거나,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도주하거나, 삐지거나···.
두말할 나위가 없는 말이지만, 공개적인 검토를 자유롭게 하고 또 받는 주체는 공개적 책임(정치적 실천)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책임이라는 것은, '아님 말고' 식으로 내뱉거나, '받아쓰기'나 '가짜 뉴스 퍼나르기'와는 엄격하게 거리를 둔다.
공공성을 의식하며 실천하는 언론은 단 한 마디 기사를 발표할지라도 그것이 자사(自社) 기사라면 이름을 걸고 그것의 공식적 공개 전 매우 여러 번 자기성찰 및 심사숙고 절차를 거친다. 취재미비, 실수, 오류, 억측, 인용출처 등은 그 단계에서 검토, 정정된다. 그래도 이후에 문제가 생기면 공개적으로 사과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잘못된 보도를 멋대로 기사화했던 언론사들은 헤드라인 크기와 기사의 분량 및 배치 등에서 왜곡 보도와 동등한 '급'으로 정정 보도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책임질 줄 아는 언론으로서 공공성을 실천하는 태도일 것이다.
칸트가 강력히 옹호하는 언론·출판의 자유는 '자유롭게, 공개적인 검토'를 기본으로 장착한 언론을 위한 찬미다. 언론사를 자처하며 공익을 추구한다는 회사들을, 칸트가 변호해줬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대조해볼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얼마 전 이슈가 잠깐 됐었던 대북 전단-삐라의 제작 및 배포는 '선전·선동'에 속하므로, 언론·출판의 자유에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문득, 한국 언론이 공공성을 갖춘 '품격 있는 언론'인지 따져본다. 그러자니, 하릴없이 마음만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