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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Oct 22. 2022

여성주의 없이 여성주의와 함께 2

여성다운, 인간다운, 소통하는 책읽기

*강원도 인제군 박인환문학축제 ‘독서포럼’ 발제글입니다. 글이 길어서, 나누어 연재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여성주의와 페미니즘 용어가 혼용됩니다. 단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이 간단히 ‘여성중심’이나 ‘여권신장’ 등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주는 연재글 마지막 편에 한꺼번에 올라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2. 여성다움과 인간다움



A. 여성은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사자(lion)’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개 수사자일 것이다. 얼굴 주변으로 흩날리는 갈기는 우리가 사자를 연상할 때 얼른 떠오르는 사자의 상징적 이미지다. 그러면 ‘소’를 연상해보라 할 때는 어떤 이미지가 연상될까? 육식을 즐기는 어떤 이에겐 살집 있는 황소일 것이고, 우유 및 유제품을 즐기는 또다른 이에겐 얼룩무늬 선명한 암소(젖소) 아닐까? 반면, 강아지나 말(馬, horse)의 경우는 암컷과 수컷 이미지를 이른바 초월(?)한다. 암컷 강아지와 수컷 강아지, 그리고 암컷 말과 수컷 말은 우리가 그들을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성별 차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강아지는 성별 불문하고 사람과 친근하고, 말은 성별 불문하고 잘 달린다.


이제 인간 이야기를 해보자.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인간’ 하면 떠올리는 대표 이미지는 남성이었다. 영어에서는 인간을 대문자 ‘Man’으로 표기하면서 남성과 인간을 개념적으로 동일시한다. 남성과 인간을 개념적으로 동일시할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생각하기’에 대한 태도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동물)’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남자사람을 떠올린다면 생각하는 활동을 간단히 남자사람에게만 귀속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류가 남긴 여러 문서들은 우리가 상당히 오래도록 생각활동을 남성에게만 배타적으로 귀속시켜왔음을 증언한다.


기 베슈텔(Guy Bethtel)은 가톨릭이 여성을 네 부류의 이미지(성녀, 마녀, 창녀, 바보)로 분류해, 여성을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간주해왔다고 고발하였다. 네 부류의 여성 이미지 모두 생각활동과 거리가 있다. 그런데 비단 가톨릭신자가 아닐지라도 그 네 종류의 여성 이미지는 꽤 대중적이어서, 그 이미지들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다(베슈텔, 2008). 충분히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선뜻 판단할 수 없듯, 가톨릭이 여성 이미지를 처음부터 넷으로 지정해서 홍보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미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여성 이미지를 가톨릭이 취합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떻든, 실제로 여자사람을 떠올리라고 제안할 때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을 얼른 연상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매우 드물 것이다.   


B. 젠더는 여성과 남성, 둘뿐인가?


최근 페미니즘 학계에서는 젠더를 양성 즉 ‘여성/남성’ 간단히 두 가지로만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많게는 14젠더(LGBTQQICAPPF2K)를 주장하기도 한다. 각각의 문자들은L(lesbian), G(gay), B(bisexual), T(transgender), Q(queer), Q(questioning), I(intersex), C(curious), A(asexual), P(pansexual), P(polysexual), F(friends and family), 2(two spirit), K(kink)를 가리킨다.


최근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들 중에서, 예를 들어 작가 자신보다 책에만 집중하기를 소망하면서 소문자로만 자기 이름을 표기하는 벨 훅스(bell hooks) 같은 이는, 현대 페미니즘운동을 이끈 특권층(중산층) 여성들이 사실상 성차별이나 여성억압을 받아본 적이 없으면서 가부장제에 반기를 들었다고 지적한다(훅스, 2008, 138). 훅스는 서구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착취에 대해 개탄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자국과 외국에서 제대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는 유색인종 여성들의 현실을 묵과하거나 복지정책 철폐를 지지하기도 한다”는 현실을 꼬집는다(훅스, 2008, 214). 계급 공통점이 생물학적 성별 공통점을 압도한다는 뜻이다.


또, ‘상호교차성’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여기에도 블랙 페미니스트들이 좀 더 많음), 젠더 관점만으로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를 보거나 인종 관점만으로 흑인여성에 대한 가정폭력보다 흑인남성에 대한 경찰폭력을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콜린스&빌게, 2016, 87). 이들은 얼핏 훅스와 유사한 입장을 가진 것 같아 보이지만, 경제적 착취구조 즉 계급제도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식으로 단정짓지는 않는다. 오히려 근본적 정체성을 하나로 확정하는 태도를 문제삼으며 ‘한 사람, 여러 정체성’을 환기하는 편에 가깝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파악하면 위험하다. ‘무슬림=테러리스트’가 아니며, ‘여성=페미니스트’도 아니며, ‘남성=폭력가해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호교차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집단 내의 젠더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생물학적 토대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이를테면 여성들 사이에서도 ‘젠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신중히 지적한다(김지혜, 2011, 66).


그리고 미국의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즘이 결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지 않는다”면서, 생물학적 여성의 몸을 갖춰야만 페미니즘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가끔 저지르는 폭력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올해(2022년) 초 버틀러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한) 트랜스 학생은 협박, 괴롭힘, 검열과 같은 다른 종류의 폭력을 당했다. 최적의 환경에서 교육받으려던 그녀의 재능은 트랜스를 적으로 오인한 사람들 때문에 좌절당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생물학적 여성만을 범주에 넣는 급진 페미니스트) 운동’의 한계를 문제삼은 것이다(한국일보, 2021년 6월 1일자). 우리 시대, 젠더를 논할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생식기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인간차별과 배타성에 대한 정치적, 윤리적, 인문학적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존재한다.    


C.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감싸고 도는가?


물론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젠더 논의들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있든 없든, 태생과 양육으로 제공된 문화권이 동쪽이든 서쪽이든, 인종적ㆍ유전적 분류표의 어디쯤에 위치하든, 심지어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어도 인간 이미지를 남성으로 대표하는 전통방식을 따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 때로는  전통방식이 몸에 배어있기조차 하다. 바로  문제를 지적하며 출범한 것이 여성학,  여성주의(feminism). 페미니즘 내부에서 점점 다양한 논의들이 일어나게  것도(2 B에서 언급함), 사실상 인간사회에서 누구를 인간으로 포함하는지 누가 누구의 경험을 배제하려 하는지를 ‘감시의 눈빛으로 검토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 출범의 계기가, 인간의 정체성을 파악(인식)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경험이 누락 혹은 배제된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자의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칭타칭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프린스턴대학교의 최초 여성교수이자 기포드강연의 최초 여성강연자였던 여성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최초 여성”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성이어서’도 아니고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도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교수와 연사로 초대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아렌트는 역설했다. 성별 불문 능력자를 중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유대인이라는 생물학적 토대주의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는데) 아렌트는 생물학적 토대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아렌트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생각할 때 그 생각의 기본바탕으로 ‘경험’ 말고 다른 게 있을 수 없으며, 성별, 학력, 직업과 상관없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힐, 2022, 15). 아렌트에 따르면, 생각(사유, thinking)은 살아있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며, 생각의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로서 생각하기는 계속 경험과 함께 간다(Aredt, 1961, 14).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추측’에 빠질 위험이 있다(힐, 2022, 219).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한 아렌트에 의하면, 생각한다는 것은 지식욕구나 진리추구와는 달리 자신의 경험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활동이다(힐, 2022, 288).


그런데, 인간의 경험에서 여성의 경험을 의도적이든 무심결이든 누락하는 사람은 여성의 생각을 누락하는 셈이 된다. 여성을 ‘생각하는 동물’ 종에서 빼낸 사람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비논리적’인 사태에 빠진다. 개념적용에서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탄생했다. ‘흑인도 인간이다(Black Lives Matter)’와 같은 맥락이다. 여성도 흑인도 ‘남성도’ 인간의 하위분류 항목이지, 평행분류 항목이 아니다. 인간과 남성이 병치되는 게 아니듯, 인간과 여성이나 인간과 흑인이 병치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종 아래에 남성, 여성, 흑인 등이 하위분류 항목으로 들어가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으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여성주의는 여성들을 감싸고 돌기 위해 출범한 게 아니다. 그리고 여성을 남성과 사회적으로 똑같이 만드는 걸 소망하지도 않았다. ‘동등하다’는 ‘동일하다’를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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