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미 Oct 04. 2024

벌거벗은 임금님: 옷을 판단 기준으로 삼은 사람들

동화란 무엇인가? (동화와 소설을 구별하는 기준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림저자 Talia Trackim


<벌거벗은 임금님>은 민간설화를 기반으로 창작된 안데르센의 동화다. 그런데 당대 독자들 중 어떤 이들은 안데르센이 계속 동화를 쓰는 것을 보며 왜 작가가 소설을 쓰지 않고 동화를 쓸까, 불평했단다. 꼬마들을 속여먹는 이야기를 쓰는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고 한다.


대체 동화란 무엇일까? 안데르센 시대 독자들의 생각처럼 꼬마들을 속여먹은 이야기일까? 본격 장르비평을 전개할 것까지는 없을 듯하다. 안데르센 동화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대중적 수준이었으니, 여기서는 대중적, 상식적 수준에서 동화와 소설을 구별해보기로 한다.


구별의 기준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해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등장인물 연령대다. 소설엔 대체로 어른들이, 동화엔 대체로 어린이들이 등장한다. 물론 절대적 기준이라 하기는 어렵다. 비행기 조종사 어른과 어린 왕자가 공동 주연으로 등장하는 ≪어린 왕자≫는 동화에 속하지만, 16세 사춘기 소년이 주인공인 ≪호밀밭의 파수꾼≫은 소설이다. ≪효녀 심청≫은 소설과 동화 쪽에 양다리를 훌륭히(?) 걸친다.


두 번째 구별 기준은 동물의 언어 구사 능력이다. 동물이 자유자재로 인간의 말을 하면 아무래도 동화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 또한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다. 돼지 몇 마리가 연설가로 등장해 전체주의 지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동화로 읽는 이는 거의 없다. 인간이 ‘벌레’로 변신해 마치 달변가처럼 자기 이야기를 인간의 정서 수준에서 서술하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도 소설이다. 반면, 두뇌가 없는 지푸라기 허수아비가 똑똑하게 말하고,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이 종종 울음을 터뜨리는 ≪오즈의 마법사≫는 동화다.  


마지막으로, 동일 작가가 제출한 일련의 작품들은 하나의 장르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작가들마다 주력 분야가 있기 때문에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 세 번째 구별 기준 또한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 없다. 비근한 예로, 안데르센이 발표한 <벌거벗은 임금님>은 민담 각색동화, 그의 <인어공주>는 순수 창작동화, 문학계의 호평과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안겨준 그의 대표작 <즉흥시인>은 소설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느낌적인 느낌’을 가지고서 동화와 소설을 구별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국은, 저자가 동화로 발표하고 또 독자가 동화로 읽으면 동화다, 라고 말하는 게 제일 안전하고 타당한 응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이렇게 질문을 바꿀 수도 있다. "구별 기준이란 것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몇 번째 기준을 지지(?!)하는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권력이란 무엇인지, 더 좁혀 말하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왜냐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주인공인 임금은 임금 같지 않은 사람, 임금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임에도 버젓이 임금 자리에 앉아서 임금으로서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권력은 ‘지지자 그룹’을 필요로 한다. 지지자가 권력자를 지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권력자는 자기 권력이 소멸할세라 두려움을 느낀다. 권력자가 권력상실의 두려움을 크게 느끼면 어떻게 되나?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게 아니라, 반대로 권력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폭력 수위가 늘어나 더 폭력적 정권이 된다. 비근한 예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초기보다 말기로 갈수록 더 폭력적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임금은 유일무이한 권력자이자 한 나라의 통치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옷을 잘 차려입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임금이다. 군대 시찰도 안 하고, 극장 구경도 가지 않으며, 마차를 타고 어딘가를 방문하지도 않으며, 국정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이 있는 자다. 안데르센은 이 임금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묘사해놓았다. “다른 통치자들은 ‘회의실에 있다’고 응당 알려지겠지만, 이 임금은 그저 ‘탈의실에 있다’라고 언급된다.”    

https://andersen.sdu.dk/vaerk/hersholt/TheEmperorsNewClothes_e.html


그런데 이런 임금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최고 통치자이자 권력자 자리에 ‘무사히’ 있으며 권력을 사용한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게 권력이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임금에게 있는 권력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이 임금이 통치자 노릇은 하지 않지만 임금 자리에 앉아있어 별 문제없이 권력을 누리던 어느 날, 사기꾼들이 임금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자, 어리석은 어떤 자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옷’을 임금께 만들어 드리겠다고 사기를 친다. 그때, 임금은 생각한다. 이 옷을 ‘기준 삼아’ 해당 직책 적합자와 부적합자를 구별하자! 동시에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자! 옷을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가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의 직무 적합도와 어리석음을 판별하고 평가한다는 게 굉장히 괴이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전연 알지 못한 채. (옷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와 무관하게, 이 대목에서 이 임금은 이미 직무 부적합자로 여겨진다)  


시간이 흐르며 장관, 사무장, 귀족 등 신하들이 모두 한결같이 사기꾼들이 만들고 있는 ‘옷이 멋지다’며 감탄을 연발한다. 그들은 우선 자기가 직책에 적합한 자라고 웅변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현명한 자로 자신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이 웅변과 입증에 다른 건 필요치 않다. ‘옷이 보인다’라고만 말하면 된다. 왜냐면 현재 임금이란 자가 옷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로 직책 적합도를 평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임금의 사고구조 수준을, 사실은 신하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임금에 그 신하들’이라고나 할까.


어느덧 임금이 옷을 착용할 시점이 되었다. 임금은 깜짝 놀랐다. 옷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옷이 안 보인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는 자기자신을 만천하에 직책 부적합자, 어리석은 자로 드러내는 것이다. 임금은 말 그대로 직책에 부적합한 자, 어리석은 자 당사자였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다. 직책 적합도와 현명성 평가 기준이 ‘옷을 알아보는 시력’에 있는 게 아님을 이제라도 선언하면 해결될 텐데, 임금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임금은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실제 현실을 왜곡한다. 어쩌면 옷이 보인다고 자기암시를 계속 주어서, 실제로 옷이 보이는 착시현상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그는 벌거벗고 대중 앞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벌거벗은 채 백성들 앞에 나서면서도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백성들 모두가 옷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를 임금됨의 기준, 신하됨의 기준, 그리고 백성됨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측은 딱 들어맞았다. 거리에 나와 임금을 반갑게 맞이하는 백성들도 임금이 제시한 기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옷이 보이면 자신의 직책에 어울리는 자다! 그리고 현명한 자다! 그러면 도대체, 구별 기준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또다시 묻게 된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도전인가? 집중인가?)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독재국가의 국민들이 그 독재로 인하여 고통받을지라도 사실상 그 독재권력이 그 자리에서 발동되고 또 유지되게끔 하는 데에 책임이 있다고 일갈하였다. 국민이 나쁜 통치자를 용납하기 때문에 나쁜 통치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다. 독재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몰아붙이는 잔인한 평가 같다. 그렇지만 곱씹어볼 만한 의견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권력은 지지자 그룹 없인 존재할 수 없다. 지지자 그룹은 국민들 속에 있다.


권력자는 완전히 고립된 한 명의 개인으로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며, 잡은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권력자는 그 권력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은 푸틴 혼자만의 ‘공격할 결심’으로 추진된 게 아니다. 속아서든 얼떨결이든 진심이든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그의 뒤를 받쳐준다. 하마스 테러 이후 1년 가까이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이스라엘 전쟁도 마찬가지다. 네타냐후 총리 오직 혼자만의 결정으로 이 불행한 전쟁이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니다. 그와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그를 지지하는 현역 정치인들, 참전 군인들, 이스라엘의 호전적 민족주의자들, 멀리서 이 전쟁을 응원하며 지원하는 미국인들과 유대인들이 존재한다(아니 ‘건재하다’).


권력은 권력자의 뻔뻔한 당당함과 지지자의 열렬한 동조와 추종이 결합되어 발생하고, 그 결합이 종료될 때까지 힘을 유지한다. 하나의 특정한 권력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결코 권력자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권력이 건강할 경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불건강할 경우 문제가 된다. 살아있는 권력을 살아있지 않게 해야 하는 과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니면 불건강한 권력을 계속 참아주며 살거나, 어떻든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살아있는 권력에 도전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살아있는 권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살아있는 권력에 제일 처음 도전한 사람은 한 어린이다. 이 어린이는 아직 오래된 권력이 남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권력을 시작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어린이의 말을 지지한다면 그 어린이가 시작한 새로운 권력은 나의 지지로 인하여 1인분만큼 강해질 것이다. 이때 그 어린이가 문자적으로 초등학생을 일컫는 게 아님에 대해서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동화 속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지적한 어린이는 새로운 권력을 시작하는 새로운 사람(혹은 ‘세대’)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이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탄생성(natality)’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지구상 곳곳에, 살아있는 권력들이 수두룩하다. 살아있는 권력 가운데 민주적 권력도 있지만, 독재적 권력도 있다. 청렴한 권력도 있지만, 부패한 권력도 있다. 그런가 하면, 병적 권력도 있고 뻔뻔한 권력도 있고 어리석은 권력도 있으며, 상대적으로 선하고 친근한 권력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정권의 권력은 어느 속성을 지녔는지 생각해보면서,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얼마만큼 파악하고 있는가? 나는 살아있는 권력이 불건강하고 어리석을 경우 그 권력에 대해 도전할 계획인가? 아니면 그저 그 권력에 발맞춰 가는 일에 집중하는가?”    


살아있는 권력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은 무엇인가?




[쿠키 텍스트] 벌거벗은 임금님은 얼마만큼 벌거벗었을까? 속옷까지는 입었을 것 같다고 추측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아무 옷도 안 입은 알몸(naked) 상태였다고 상상하는 분들도 있다. 임금님이 입은 옷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걸 정확히 아는 사람이 우리들 중엔 ‘없.다.’

그림출처: https://www.linkedin.com/pulse/emperors-new-clothes-power-followership-jason-r-lambert-ph-d-

이전 02화 백설공주: 마법 거울이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