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1812년 출간된 그림 형제(brothers Grimm)의 동화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백설공주>의 주인공은 ‘백설(Snow-White)’이란 이름의 공주다. 이름 뜻은 ‘눈처럼 하얀’이다. 백설공주가 아직 어릴 때에 공주의 생모가 죽는다. 생모가 사망하자, 백설공주의 아빠(왕)는 아름다운 외모 하나만 보고 재혼을 추진한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왕이 ‘마법 거울’에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운가?”(Who in this land is the fairest of all?) 물으면 매번 마법 거울은 “여왕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fair’의 뜻은 아름답다, 깨끗하다, 살결이 희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백설이란 어감상 ‘살결이 희다’가 더 적합할 것 같긴 한데 ‘아름답다’로 번역되는 게 대세이니, 이 글에서는 그 대세를 따르려 한다.
세월은 흘러, 백설공주가 일곱 살이 되었다. 그다지 많이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초등학생 정도로 자란 거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마법 거울의 응답 내용이 돌변한다. 여왕님도 아름다우십니다만, 백설공주가 그보다 1000배는 더 아름답다고….
초판 <백설공주>에서는 백설공주의 나이가 일곱 살로 표기되었지만, 이후 버전에서는 백설공주를 십대 소녀로 묘사한다. 1937년판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백설공주가 14~15세 정도의 소녀로 그려졌다. 그 이후 백설공주의 나이가 7세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일곱 살 여자아이를 두고 여성적 아름다움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어딘가 께름칙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고려한 까닭인 듯하다. 병적 아동성애자들을 불길하게 자극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같은 류의 사회적 공감대.
그런 반면 오늘날 14~15세에 이른 소녀의 경우 성인 여성과 외모를 겨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만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있다. 물론 여성들끼리 외모를 겨룬다는 것에 대해 여성들은 대체로 거부감을 느낀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들도 자신이 아름다운 외모 한 가지만으로 평가받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표출한다. 혹시 일정 정도 아름다운 외모 덕을 보는 게 사실일지라도, 그 아름다운 외모가 자신의 인품과 성격을 진실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백설공주를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소녀로 생각한다. 백설공주가 ‘살결이 흰’ 소녀임에는 틀림없다. 살결은 확실히 하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할리우드 여배우 말고 일반적 백인 여성들을 떠올리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응답할 수 있으리라. 이 세상 모든 백인 여성들이 전부 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었다고 (미안하지만) 말할 순 없다. 어차피 아름다움이란 것이 백인 여성들에게만 쏠려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달리 보기도 하니 기준이 단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가 <백설공주> 실사화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눈에 띄게 예쁜 외모보다는,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외모에 몹시 하얀 피부를 지닌 백인 소녀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문득 궁금하다.
공주가 ‘백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어머니의 소망 때문이었다. 눈 내리는 날 창문가에 앉아 바느질하던 한 여성이 아기에 대한 자기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빨갛고, 창틀 나무처럼 까만 아이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네.” (If only I had a child as white as snow, as red as blood, and as black as the wood in this frame.)
https://www.grimmstories.com/en/grimm_fairy-tales/snow-white
눈처럼 하얗다는 표현은 피부색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합리적 추론이다. 하얀 얼굴은 하얀 분장을 과장되이 강조하는 일본의 가부키와 중국의 경극을 떠올리게 하지만, 백설공주는 태생적으로 하얗고 밝았을 것이다. 아울러, 피처럼 빨간 것은 입술을 지목한 것, 나무처럼 까만 것은 머리카락 색깔을 말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 동화가 창작되고 통용되던 나라(서양 여러 국가)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그러므로,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여타 요소 및 설정을 부가하거나 삭제하는 건 자칫 헛수고가 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엔 <하얀 눈썹 호랑이>라는 게 있다. 어떤 우람한 호랑이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인간의 마을을 돌아다닌다. 마음을 읽는 능력은 하얀 눈썹에 들어있다. 어느 날 도롱이를 입은 한 꼬마에게 감동받은 호랑이는 흔쾌히 자신의 하얀 눈썹을 뽑아 도롱이 꼬마에게 준다. 만일 우리나라가 <백설공주>를 창작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백설공주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여왕과 아름다움을 경쟁한다. 백설공주가 이 경쟁에 자진해서 뛰어든 건 아니다. 여왕 쪽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경쟁이며, 백설공주는 알지 못하는 경쟁이다. 백설공주는 아름다움을 갖췄지만 아름다움에 무지하다. 이 경쟁에서 유일한 심사위원은 마법 거울이다. 마법 거울이 백설공주를 최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지명하면 그 순간 여왕은 분노한다. 마법 거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마법 거울은 여왕의 살해 의지에 불을 붙인다.
여왕의 첫 번째 살해는 청부살인이다. 여왕은 사냥꾼에게, 백설공주를 숲속에 데리고 가서 죽인 다음 폐와 간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사냥꾼은 백설공주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사냥꾼은 백설공주 대신 수퇘지를 죽여 그것의 폐와 간을 꺼내 여왕에게 가져간다. 여왕은 사냥꾼이 가져온 폐와 간을 먹는다. 백설공주의 폐와 간으로 알고 먹은 것이니, 참으로 잔혹하고 엽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여왕이야 그렇다 치고, 마법 거울은 그러면 결백할까? 가만 보면 마법 거울은 진실만 말한다는 원칙을 관철하느라 백설공주의 안위에 대해서는 0.001초도 고려하지 않는다. 마법 거울은 원칙과 본분에 충실하다. 여왕의 청부살인 뒤에도 마법 거울은 백설공주의 생존을 언급하며 “백설공주가 1000배는 더 아름답습니다”라고 응답한다. 심지어 마법 거울은 묻지도 않은 추가정보를 태연하게 발설한다. “숲 너머, 일곱 난쟁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백설공주가…”라고 말이다.
마법 거울은 자신의 사용자에게 친절하다. 동시에 백설공주의 생명에 대해서는 잔인할 만큼 무심하다. 여왕의 살인 시도는 마법 거울의 응답에 달려있다. 백설공주가 난쟁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날 때마다 마법 거울은 그걸 시쳇말로 ‘귀신같이 알아내어’ 여왕에게 알려준다. 거의 일러바친다. 백설공주의 생존 여부를 여왕이 알게 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나는 알지만, 나는 모르겠다, 라는 식.
그리하여 우리는 마법 거울이 사유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풀어 말하면 이렇게 된다. 마법 거울은 자신의 말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건을 일으키게 될지, 사유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관찰하며 발견했던 무사유가 정확히 그런 의미의 무사유였다.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보며 경악했던 ‘무사유’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지 못함’이었다. 이건 불멍, 물멍 등 ‘멍때리기’를 통한 명상 혹은 묵상, 잡생각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활동을 (혹시 사안 별로 포함할 수는 있겠지만) 무차별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요컨대 생각 없음, ’생각하지 않음(못함)‘을 지칭하지 않는다.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유대인을 이 세상에서 없애는 학살 프로젝트(최종해결책)에서 절정을 이룬다. 최종해결책을 고안하기 위해 아이히만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최종해결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머리를 짜내는, 그 나름의 ‘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유 활동은 역설적으로 무사유 활동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아이히만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최종해결책을 인간 대 인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로 사유하지 못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유대인과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던 적도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그때의 친밀한 인간관계 경험을 자신의 이후 행동에 적절히 반영할 만큼 ‘연결’하지 못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인간관계 경험 자체가 따로따로 분절, 굴절되어있었다.
<백설공주>에 등장해, 이야기가 백설공주에게 불행한 쪽으로 계속 진전되게 하는 역할을 맡은 마법 거울은 아이히만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마법 거울은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살인을 일으킨다는 것에 대해 짐짓 모르는 체한다. 마법 거울이 있어 여왕은 악한 짓을 실행할 핑계를 얻는다. 이는 아이히만이 있어 히틀러가 악한 짓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에 비견할 수 있다.
나는 동화 속 소품인 마법 거울에게 무려 ‘사유’를 주문하는 게 아니다. 이 동화를,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새롭지만 재미없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마법 거울을 빌미 삼아 우리가 무사유의 아이히만을 잠시나마 떠올려보기를 권할 따름이다.
동화의 나라에 선한 캐릭터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동화의 나라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사는 게 당연하다. 동화의 나라에는 선한 캐릭터도 존재하고, 악한 캐릭터도 존재하며, 순진무구 또는 천진난만한 캐릭터도 존재하고, 선한지 악한지 애매한 캐릭터도 존재할 수 있다. <백설공주>의 경우에는 ‘악의 평범성’ 캐릭터가 ‘마법 거울’의 이름으로 나타나, 독자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해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쿠키 텍스트] 백설공주가 생을 되찾은 계기는 지나가던 백마 탄 왕자의 키스(이마, 혹은 입술)가 아니었다. 백설공주의 유리관을 옮기던 중 누군가가 (난쟁이? 왕자? 왕자의 하인?) 덜컹, 실수로 흔들리게 한 바람에 기도를 막고 있던 사과 조각이 튀어나와 그녀가 다시 호흡할 수 있게 됐다. 말하자면 우연찮게 실행된 ‘하임리히법’이었다는.
그림출처: https://pin.it/1XlZFEdH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