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하면 금방 ‘긴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라푼젤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긴 머리카락이다. 마녀가 탑 밑에 서서 “라푼젤, 라푼젤, 머리를 내려다오(Rapunzel, Rapunzel, let down your hair.)”라고 소리치면 탑 안에 있던 라푼젤이 긴 머리카락을 풀어 탑 아래로 내려보내준다. 이 이미지는 <라푼젤>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그리고 <라푼젤>은 이 긴 머리카락 색깔을 처음부터 ‘제한’한다. 라푼젤의 머리카락 색깔은 다름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금발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Tangled)>의 경우, 남자 주인공 ‘플린(본명, 유진)’은 라푼젤을 부를 때 몇 번인가 ‘블론디(Blonde)’라고 부른다. 길고 짧음보다 색깔을 더 강조하는 호칭이다. 그림 형제 동화집에 라푼젤이 첫등장할 때도 라푼젤은 금빛의 긴 머리카락을 지녔다.
라푼젤은 ‘고델(마녀의 이름)’이 지정해준 탑 안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라푼젤이 탑에 갇히게 된 까닭은 그녀의 부모 때문이다. 엄마가 마녀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을 먹고 싶어했고, 아빠가 그 식물을 훔쳤기 때문에 라푼젤이 그리 된 것.
대개의 동화가 그렇듯, 인물의 이름은 그 인물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아가씨’의 뜻이고, 백설공주는 ‘눈처럼 하얀 소녀’를 가리킨다. 그러면 라푼젤은 무슨 뜻이며, 무엇을 드러낼까? 라푼젤은 꽃 이름이다. 초롱꽃 종류라고 한다. 라푼젤의 엄마가 먹고 싶어했던 식물, 마녀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던 그 식물의 이름이 라푼젤이었다. 그러니까, 라푼젤에서 우리가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만을 연상한다면 동화의 절반쯤에서 멈추는 일이 될 것 같다. 라푼젤은 ‘마녀가 키우는 식물’이니까, 마녀와의 연관성 속에서 라푼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라푼젤은 고델이라는 마녀와 동거한다. 그런데, 동화의 줄거리를 잘 살펴보면, 마녀 고델은 탑에서 자주 나간다. 흡사 출퇴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델이 탑을 나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머무는지는 동화가 소상히 밝히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도 일종의 마녀 ‘짓’을 하느라 외출하는 것일 텐데, 그래서, 고델의 마녀짓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동화의 서두에서 마녀는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한 이’로 소개되었다. 여기서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했다는 것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돌본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혹시, 고델의 마녀짓이란 식물을 아름답게 키우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꽤 높다. 실제로 식물 키우기는 서양사회에서 마녀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 마녀의 취미 혹은 기술로 특정되곤 했었다.
서양사회, 특히 유럽엔 중세부터 근대까지 마녀재판(정확히 말하면 마녀사냥)이 아주 활성화되어있었다. 우리나라에 마녀재판이 없었긴 했지만, 그게 여성을 존중하는 사회였다는 증거는 되기 어렵다. 인간사회는 복잡한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요소만 가지고 그 사회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서양사회가 어째서 어떤 여성들을 마녀로 분류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살았지만 여성과 노예는 민주주의 제도에 포섭되지 않았다. 여성과 노예는 민주주의 제도가 미치는 영역 즉 폴리스 주변에 포진되어있으면서, 그리스 남성 자유인들이 폴리스에 들어가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며 살 수 있도록 ‘활동’했다. 그들이 전개한 활동의 내용이 곧 ‘노동’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을 가능케 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생계 활동을 ‘노동’이라 불렀다. 그리스 사회에서 당시 남성 자유인들은 정치적 삶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적 삶의 혜택과 열매를 독점적으로 누린 사람들이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제도는 실제로 민주주의 제도를 지탱하며 그것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누린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민주주의가 잘못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한 특정 부류의 인류가 잘못한 거다.
한편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아렌트가 민주주의 정치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배제된 ‘노예와 같은’ 처지로 격하(?)시켰다고 보았다. 그러한 의견들에 대하여 아렌트가 일일이 변명하지 않았더니, 아렌트는 1960년대 이후 활짝 꽃을 피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안티페미니스트로 의심을 받았다. 어떤 페미니스트(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의 정신에 간직된 남성 이데올로기를 아렌트에게서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안티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아렌트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 여성 집단을 민주주의 제도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공적 영역이 ‘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실재했는데 ‘그런 속성을 지닌 폴리스가 민주주의 제도의 처음이었다’고 솔직히 진술하는 게 어째서 안티페미니즘이란 말인가.
여성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왜곡 없이 알아보려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을 개념정의하기를, 자신을 타인과 다른 사람으로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드러내는 공간이라 하였다. 즉 공적 영역이란 사람들의 의견과 행위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의견과 행위를 다져나가는 활동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식의 암묵적 고요는 미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과 느낌을 피력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 같은 공적 영역으로 들어서도록 허락받은 적이 없다.
허락받지 않았어도 들어섰었어야 했다고?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허나, 그런 여성들은 대체로 ‘마녀’로 찍혔다. 사람들은 (주로 남성들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으로 ‘튀어나온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 머물러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들 중에 공적 영역으로 ‘튀어나오는’ 여성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막아도 막아지지 않았다. 사적 영역에 눌러앉아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만 하는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공적 영역을 넘보고 누구의 눈에도 잘 띄게끔 매력있고 능력있는 여성들을 바라볼 때 남성들은 웬일인지 두려웠을 것 같다.
어떤 여성은 환자를 말끔히 치유할 만큼 의술이 뛰어났고, 어떤 여성은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으며, 어떤 여성은 여러 물리적 조짐과 심리적 징후를 합리적으로 판단해 장차 공동체에 닥칠 불행한 사건사고(재난)를 틀림없이 예측했다. 그런 여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남성들은 당황스러웠을 수 있다. 그들은 공적 영역에서 포착되는 여성들에 대하여 적합하게 반응하기가 불편했을 수 있다. 남성들은 ‘공적 영역으로 들어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드러내어 보이는 특출난 여성들’을 감당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런 여성들이 하나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점점 많아질 경우엔 여유를 내기가 더 어려웠으리라. 이렇게 여유 없는 마음들이 쥐어짜듯 생각해낸 것이 ‘낙인찍기’였다. “마녀가 나타났다!”
아렌트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자유는 ‘내 맘대로 무언가를 행한다(욕망)’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혹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해방)’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는 ‘내 행위는 내가 정해서 내가 행한다’의 의미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적극적 자유의 의미와 상통하는 자유다. 사회심리학자 프롬에 따르면, 이 자유는 속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의 자유(소극적 자유)와 같지 않다. 프롬은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를 적극적 자유로 불렀다.
왕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라푼젤은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탑 안에서 살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라푼젤이 고델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가 나타났다. 왕자는 고델을 흉내내어 탑 안으로 들어간다. 왕자를 본 라푼젤은 고델과 자신이 일구어온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대번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세계가 이전과 달리 조금 넓어진 이상 라푼젤은 이전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고델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사람을 만났으나, 라푼젤은 그 사람을 두고 거리두기나 낙인찍기 같은 해결방안을 생각해내지 않았다.
왕자와 친해진 라푼젤은 그에게 “이 탑에서 나가서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먼저 제안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라푼젤은 고델에게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발표한다. “왜 왕자보다 당신이 더 무겁지요?” 그러자 고델은 라푼젤을 단호하게 처벌한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쌍둥 자른 다음 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이건 처벌이라 하기 어렵다. 라푼젤은 감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이미 어느 정도 자유로웠지만 라푼젤은 드디어 물리적 자유를 확보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이다.
탑 안에 있을 때 라푼젤은 대체로 반복적인 활동만 할 수 있었다. 고델이 머리카락을 내려달라 하면 내려주었고, 끌어올리라 하면 끌어올렸다. 거의 자동적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왕자가 나타났을 때 라푼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젠 탑 아래에서 머리카락을 내려달라는 사람이 고델일 때도 있고, 왕자일 때도 있다. 라푼젤은 자기 머리카락을 탑 바깥으로 풀어내릴 때마다 ‘정해진 질서’보다는 ‘파격적 스릴’을 느꼈을 것 같다. “이번엔 누굴까?” 하면서.
아렌트는 ‘자동적 진행’을 중단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고, 여기 가라 하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 하면 저기 가고…, 이러한 것들이 자유가 아닌 이유는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측한 대로 변화가 없이 일련의 행동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까닭에, 자유가 아니다. 또,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추우면 옷을 겹쳐입는 일과 같은 반사적, 자동적 행동 또한 자유가 아닌데, 그 까닭은 거기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체계에서, 자유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한다’와 동의어다. 아렌트가 말한 자유의 의미로 <라푼젤>을 다시 읽으면, 라푼젤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한 사람이다. 자유의 사람이다. 라푼젤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때가 오자,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다. 라푼젤은 탑 안에 갇혀있을 때에 이미 새로운 것을 시작했다. 고델이 예측하지 못한 말과 행위를 보인 것이다. 라푼젤은 고델 앞에서 용감하게 왕자의 존재를 이야기했고, 고델과 왕자를 과감히 비교했다. 왕자와의 관계를 자유롭게 시작했고 자유롭게 유지했다. 라푼젤은 고델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방식과 내용으로 ‘새로운 사건’을 시작했다. 이렇듯 용감하게 새로운 사건을 시작할 수 있었던 라푼젤은 마침내 탑 바깥으로 풀려나왔다. 탈옥한 것도 아니고, 고델을 속인 것도 아니다. 정직하게 새로운 행위를 시작함으로써, 라푼젤은 이전보다 더 큰 자유를 얻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해본다. 라푼젤을 ‘정의의 여신 디케’에 필적하는 ‘자유의 여신’으로 호명하면 어떨까? 정의의 여신 디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 ‘자유의 여신’ 라푼젤은 동화에 등장하는 여성, 뭔가 리듬도 어울리고 의미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쿠키 텍스트] <라푼젤>에서 왕자는 라푼젤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왕자는 라푼젤이 쫓겨난 뒤, 이전에 했던 대로 탑에 방문했다가 고델과 마주치게 되었고, 고델이 그를 가시덤불에 떨어지게 하는 바람에 눈이 멀어버린다. 그는 눈먼 떠돌이가 되어 라푼젤을 찾아다닌다. 그리 떠돌아다니다 허위허위 도착한 사막에서, 라푼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왕자는 라푼젤에게 다가간다. 라푼젤은 딸아들 쌍둥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되어있다. 눈 먼 떠돌이 거렁뱅이를 과거의 왕자로 알아본 라푼젤은 너른 마음으로 그를 거둔다. 그뿐인가, 라푼젤의 눈물이 왕자의 눈에 떨어지자 그는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왕자의 눈 먼 떠돌이 거렁뱅이의 삶을 멈출 ‘계기’가 되어준 이가 라푼젤이다. 한편 왕자는 지난날 라푼젤이 자유로운 행위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였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방적 구원은 없는지도 모른다. 서로서로 구원의 계기를 마련해주거나, 구원의 계기를 그저 주고받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