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눈 뜨고 못 뜨고’의 문제는 절체절명의 문제다. 심학규(심봉사)가 그랬다. 그 자리에서 물구나무를 서보라 했다면 당장 물구나무를 섰을 것이고, 진흙탕을 뒹굴어보라 했다면 그 또한 당장 시행했을 것이다. 채만식의 작품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아이의 오줌을 마시라 했어도, 아마 마셨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인 심봉사는 눈이 몹시 뜨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그에겐 눈 뜨는 것이었다. 만약 심봉사가 공양미 구백석을 제안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것도 약속했을 것 같다. 자신의 절실함의 수준을 삼백석보다 구백석이 더 잘 표현해준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공양미를 마련할 자금이 그에게 없었다. 심봉사는 걸인 수준으로 가난했다.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그 의지를 구체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신세였다. 눈 뜨고 싶다는 의지도 강했고, 공양미 삼백석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도 강했지만, 현재 심봉사에겐 두 의지의 현실화, 모두 불가능했다.
허나, 심봉사가 사는 동안 자신의 의지를 현실로 구현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일례로 심청이 갓난 아기일 때 아기 엄마가 사망하자 심봉사는 다음과 같이 의지를 다진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올 수 없는 법이라. 할 수 없으니 이 자식이나 잘 키워내리라.” 그렇게 의지를 다진 다음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매일같이 아기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젖동냥을 했다. 동네 여인들이 그에게 협력했다. 심봉사의 의지가 통했다.
‘아기를 잘 키워야겠다’는 그의 의지(will)는 ‘아기를 잘 키울 수 있다’는 그의 능력(can)으로 나아갔다. 그러기까지는 ‘현실적 궁리’과 ‘합리적 검토’가 뒷받침되었다. 그렇게 보면, 심청이라는 인물의 성장과정 자체가 심봉사의 ‘의지=능력’을 표상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심청은 ‘시쳇말로’ 잘 컸다. 효심이 깊은 소녀로 자라났다. 심청은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 대신 거리로 나가 구걸을 해서 아버지를 모셨다. 열다섯 살때쯤 되니, 아버지가 홀로 남게 될까 걱정이 된다는 이유로 장승상 댁 수양딸 제안마저 거절하는 어마어마한 효녀로 성장했다.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의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격언 중 하나다. 그러나 “공부 열심히 하면 누구나 S대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잘 알 듯 경험적 현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면 된다”는 의지를 다지는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면 굉장히 많다. 물론 “하면 된다!”는 의지는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훨씬 낫지만, 의지가 있다 해서 자기 인생에서 의지를 완벽히 구현하며 사는 건 아니다. 의지와 능력은 어차피 자주 어긋난다.
여기서 우리는 몽운사 화주승이 개천에 빠져 거의 죽게 된 심봉사를 구해준 뒤 공양미 삼백석을 운운할 때, 이미 심봉사에게 그 만한 재물이 없음을 곧바로 지적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댁의 집안 형편에 공양미 삼백석을 무슨 수로 장만하겠느냐면서 시주 약속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바로 이때 심봉사는 사람 업신여기지 말라며 ‘공양미 삼백석 심학규’를 기록하도록 스님을 촉구했다. 명백히 ‘홧김’이었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심봉사의 공양미 삼백석 약속에는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의지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눈을 뜨겠다는 의지, 다른 하나는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심청은 아버지의 시주 약속을 들었을 때, 실수가 일으킨 오류 혹은 홧김에 저지른 과오로 그 약속을 다루어서, 그에 대해 몽운사에 양해를 구하겠다는 다분히 현실적인 궁리를 하지 않는다. 공양미 삼백석 시주 약속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명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마침 바다에 빠져 파도를 잔잔케 해줄 처녀를 구한다는 뱃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공양미 삼백석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심청은 바다에 빠져 죽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심청이 뱃사람들에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장승상 댁 마님이 공양미 삼백석을 대납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가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심청에겐 새 선택지(option)가 생겼다. 하지만, 심청은 장승상 댁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도 하지 않는다. 간편하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삼백석을 마련할 수 있는데도(can), 아버지를 떠나지 않을 수 있는데도(can), 아버지께 오래오래 효도할 길이 열렸는데도(can), 심청은 죽겠노라는 자신의 의지(will)를 관철한다. 혹, 뱃사람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였을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제는 효도가 문제가 아니다. 약속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심청은 효도가 중요한 소녀가 더 이상 아니다. 약속이 중요한 소녀다. 심청이 죽겠다는 의지를 관철하려 할 뿐, 삼백석 대납을 용납지 않자 장승상 댁 마님은 몹시 슬퍼한다.
“아아 슬프도다, 심소저야.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즐겨함은 인정에 당연커늘, 일편단심에 양육하신 아버지의 은덕을 죽음으로 갚으려고 잔명을 스스로 끊어, 고운 꽃이 흐려지고 나는 나비 불에 드니 어찌 아니 슬플소냐?”
<효녀 심청> 중에서.
아렌트가 고찰한 ‘철학의 역사’ 혹은 ‘의지의 사상사’에 따르면, 의지는 반(反)의지 상황에서 강하다. 의지의 태생 자체가 반의지를 전제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의견이다. 가깝게 자기자신을 살펴보라. 영화관람 의지는 평소에 강한가, 아니면 시험기간에 더 강한가? 음식을 먹고 싶은 의지는 평소에 강하게 솟는가?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을 억지로 해야 할 때 더 강하게 솟는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3>의 결말 부분에서는 의지와 반의지 상황이 극적으로 펼쳐지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땅이 흔들리고 벽이 무너지는 찰나, 갈라진 땅 가장자리에 성배가 절묘하게 얹혀있다. 어떤 사람이 성배를 집어올리겠다는 의지에 휩싸여 손을 뻗으며 안간힘을 쓰다 갈라진 땅 저 아래로 방금 전에 추락했다. 인디아나는 그걸 다 목격한다. 그래놓고는 인디아나 또한 성배가 자기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한 상황이 되자, 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 팔을 조금만 더 뻗으면 성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는 ‘잡을 거야’라는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성배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즉 반의지 상황이 강렬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반의지 상황이 강렬해질수록 그의 의지는 그에 비례해 더 간절해지고 더 강렬해진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인디아나”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인디아나는 자신의 의지를 누그러뜨린다. 그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반의지 상황에서 눈을 돌린다. 동시에 인디아나의 의지도 수그러든다. 영화 사이트 imdb는 그 장면만 잘라서 올려두었다.
한편 우리의 심청이는 죽지 않으며, 운명에 패배하지 않는다. 심청은 용왕의 궁전으로 이동해 친어머니를 만난다. 거기서 잘 지내다 3년 뒤 뭍으로 돌려보내져, 황제의 아내(황후)가 되어, 맹인잔치를 성대하게 열어, 마침내 극적으로 아버지를 만난다. 심청을 만난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뜬다. 비단 심봉사뿐이랴, 세상 모든 맹인들도 다 눈을 번쩍번쩍, 뜬다.
어찌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에서 딱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딱 밝았다. 그 자리에 가득 모여 있던 맹인들이 심봉사 눈뜨는 소리에 일시에 눈들이 뜨이는데, ‘희번덕, 짝짝' 까치새끼 밥 먹이는 소리 같았다. 뭇 소경이 밝은 세상을 보게 되고, 집 안에 있는 소경, 계집 소경도 눈이 다 밝고, 배 안의 소경, 배 밖의 맹인, 반소경 청맹과니까지 모조리 다 눈이 밝았으니, 맹인에게는 천지개벽이나 다름 없었다.
<효녀 심청> 중에서.
<효녀 심청>에서는 뺑덕 어멈 하나를 제외하면 배신도 없고, 뒷거래도 없고, 거짓말도 없고 속임수도 없다. 주인공 심청을 방해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고, 심청을 억압하는 상황은 아무것도 전개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해, 주인공 심청이 의지를 아주 강하게 내야만 하는 ‘계기’가 없다. 제반 환경은 일제히 심청에게 유리한 쪽으로, 심청이 굳이 죽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배치된다. 그렇지만, 심청의 죽어야겠다는 의지는 세상 제일 강하다. 그러니까 <효녀 심청>이라는 동화에는 사실 꼭 그렇게까지 강할 필요가 없는데도, 엄청나게 강한 의지를 내는 소녀가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만사, 인간사에서는 의지가 ‘다’가 아니다. 의지가 언제나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의지의 현실화가 언제나 반드시 이룩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따로 말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의지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강한 의지가 자아내는 긴장을 받아들이며 사는 순간은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높은 기간이다. 우리의 평범한 인간사는 (심지어 전쟁터에서조차) 의지, 능력, 행운, 불운, 자연스러움, 어쩌다 얻어걸림 등의 요인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진행된다. 때로 협상도 필요하고, 체념도 필요하며, 심지어는 취소하기나 도망치기도 필요하다. 때로는 한 번의 부끄러움을 참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효녀 심청>은 그 같은 인간사의 보편성과 자연스러움을 우회한다. 장승상 댁 마님의 호의라는 대목이 없더라도,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이들은 심청이 죽어야만 꼭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 하다하다 안 되면 아버지를 모시고 몽운사에 가서 형편을 솔직히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죽는 것보다 덜 힘들고 덜 극단적인 일이다. 게다가 희망이 없지도 않은 게, 몽운사 스님은 심봉사가 애초에 공양미 삼백석을 바칠 수 없는 형편이란 걸 알아봤던 사람이다. 공양미 삼백석이 부족해 그 사찰이 당장 문을 닫게 되는 것도 아니다.
끝으로, <효녀 심청>을 ‘의지’의 관점에서 읽을 경우 반드시 이 글처럼 읽게 되는 게 아님을 밝힌다. ‘의지’라는 해석의 관점만 같을 뿐 아주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글과 마찬가지로 <효녀 심청>을 ‘의지’라는 주제로 해석한 책이 있어, 비교와 대조를 위해 소개한다.
[쿠키 텍스트] 뺑덕 어멈은 심봉사와 함께 떠돌아다니다 심봉사를 배신하고, 역시 맹인인 황봉사를 따라간다. 그렇다면, 심봉사가 맹인 잔치에서 눈을 뜰 때 세상 모든 맹인들이 다같이 눈을 떴으니, 황봉사 또한 같이 눈을 떴을 것 같다. <효녀 심청>에서 굳이굳이 악인으로 분류되는 유일한 1인, 뺑덕 어멈도 벌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익숙한 옛이야기 구조마저 <심청전>에서는 힘을 못 쓴다. 심청의 의지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