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라는 작품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였다!” 이렇게 말이다!
동화의 원문을 반드시 읽어야 줄거리를 정확히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줄거리를 정확히 알아야 동화를 잘 이해, 잘 감상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무튼 우리는 다양한 경로로 <미운 오리 새끼>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시험삼아 원문을 토대로 줄거리를 요약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아래 사이트에서 원문 영어 번역을 가져왔다. 덴마크어를 아는 사람은 덴마크어로 읽을 수 있다.)
https://andersen.sdu.dk/vaerk/hersholt/TheUglyDuckling_e.html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었더니 오리 새끼들이 하나씩하나씩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러나 가장 큰 알 하나가 오래도록 깨지지 않았다. 한 늙은 오리가 마지막 알 하나를 품고 있는 어미 오리를 찾아왔다. 늙은 오리는 “혹시 칠면조 알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다. 드디어 큰 알이 깨졌다. 거기서 나온 녀석은 아주 못생겼다. 어미 오리는 녀석이 진짜 칠면조라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그 걱정은 곧 말끔히 사라졌다. “휴우, 칠면조가 아니었어. 헤엄칠 줄 알잖아. 오리가 틀림없어.”
그러나 모든 오리들은 ‘밉게 생겼다’는 이유로 형제들까지 포함해서 미운 오리 새끼를 꼬집고 때렸다. 닭들은 녀석을 쪼았다. 나중엔 어미 오리조차 “네가 멀리 떨어져서 저쪽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급기야 녀석은 가출했다. 가다가 만난 야생 오리들이 말했다. “너 참 못생겼다!” 그들과 헤어진 뒤 야생 거위 두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녀석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들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즉사한다. 미운 오리 새끼는 총 맞은 야생 거위 두 마리를 물어가려고 달려온 사냥개가 코앞에까지 왔다가 자기를 물지 않고 가버리는 걸 보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못생겨서 그 사냥개가 그냥 갔네.‘
미운 오리 새끼가 도망쳐 도착한 곳은 고양이, 암탉, 노파가 사는 오두막이었다. 고양이, 암탉, 노파는 미운 오리 새끼를 암컷으로 간주하고, 알을 낳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녀석은 알을 낳을 수 없었다(수컷이었으니까). 녀석이 하고 싶은 것은 오직 헤엄치기뿐이었다. 고양이, 암탉, 노파는 수영 따위는 왜 하러 가느냐 핀잔을 주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오두막을 뛰쳐나와 호수로 갔다. 한참 수영하는 중, 녀석은 호숫가 주변 생물들이 모두 자기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왔다. 떠돌이가 된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에서 백조 무리를 보았다. 녀석은 그들 곁에 다가서지 않았다. 녀석은 언감생심 백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녀석에겐 온통 오리 생각뿐이었다. 녀석은 자기가 오리들에게 용납되기를 소망했다. 멀찍이 떨어져 따로 고민하며 헤엄치던 녀석은 한 농부에게 발견된다. 농부가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자 농부의 아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와 놀고 싶어했다. 하지만 겁에 질린 녀석은 아이들의 의도를 오해해서 펄쩍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온 가족이 그를 잡으려 했고, 때리려 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필사적으로 그 집에서 탈출했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봄, 그리고 다시금 도착한 호숫가.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 무리를 또 다시금 만났다. 미운 오리 새끼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맞아 죽는 게 낫겠어.’ 녀석은 백조 무리 쪽으로 헤엄쳐갔다. 녀석은 “나를 죽여!”라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였다. 물 위에 비친 자기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 주위로 백조들이 다가왔지만 녀석을 해치는 백조는 없었다. 어린이 몇 명이 달려와서 말했다. “새로운 아이가 왔어요. 제일 잘 생겼어요.” 그 말에 녀석은 너무 부끄러워 날갯죽지 아래에 머리를 파묻었다. 과거에 미운 오리 새끼였던 백조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박해받았고 멸시받았는지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라며 와글와글 떠들었다. 녀석은 이렇게 외쳤다. “못생긴 오리 새끼였을 땐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행복이 있는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I never dreamed there could be so much happiness, when I was the ugly duckling.)
안데르센 동화의 원문 <미운 오리 새끼>를 요약해보았다. 가능한 한 원문을 충실히 요약하고, 될 수 있으면 안데르센이 줄거리 전개에서 등장케 한 인물들(동물 포함)을 빼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요약해놓고 보니,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판명나는 무척 간단한 이야기로 유명한 <미운 오리 새끼>가 정말로 꽤 입체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편, 아렌트는 <미운 오리 새끼>와 비슷한 이야기, 유사한 메시지를 담은 책을 썼다. 동화를 썼다는 게 아니고, 한 유대인 여성의 전기(어쩌면 ‘평전’)를 썼다. 그 유대인 여성 주인공의 이름은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1771-1833)’이다. 라헬의 남편이 수고한 까닭에 라헬의 문집이 이미 출간되어있어서, 아렌트는 자신보다 백삼십여 년쯤 앞서 태어나 유럽 땅에서 살아간, 자기와 같은 유대인 여성 라헬이 남긴 글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라헬은 18세기말 19세기초(계몽주의-낭만주의 시대) 독일 베를린에서 ‘살롱’을 주관한 당찬 여성이었다. 그리고 ‘베를린 괴테 컬트 효과’의 창시자였다. 그녀의 살롱에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 자유주의신학자 슐라이어마허,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 슐레겔, 교육자와 행정가로 활약한 훔볼트 형제 등 문화예술계, 학술교육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살롱의 걸출한 인물들 사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누구보다 그들을 잘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예술적 지향과 학문적 고뇌를 공유하며, 그들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었던 라헬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들 사이에서 라헬은 자신의 삶과 운명에 관한 한 “위대한 무식쟁이(the greatest ignoramus)”로 통했다. 왜 그랬을까? 그녀가 자기정체성을 충실히 발현하며 사는 일, 다시 말해 유대인으로서 사는 일에 대해 혼란과 불안에 휩싸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중세가 끝나면서 유대인 사회 안에서 삶의 ‘좋은 방편’으로 서로서로 추천했던 ‘동화’의 의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정체성을 버리고 지금 자기가 몸붙여 사는 나라의 사람들과 가능한 한 비슷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된 유대인들은 자기가 소속된 나라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고 군입대도 했으며, 비유대인과 자유연애-국제결혼을 단행했으며, 유대교를 고집하지 않고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반대로 ‘게토’는 유럽 어디에 살든 자신의 유대인다움을 꼿꼿이 지키는 것을 뜻한다. 그들 중엔 시온으로 돌아가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했던 급진적 ‘시오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그 사회에 동화될지라도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언제나 그냥 유대인으로 바라보며 대한다는 차가운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정한다.
라헬은 다른 유대인 어린이들처럼 어릴 때부터 동화와 게토 사이의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어렸을 땐 유대인들이 쓰는 독특한 언어 ‘이디쉬어(독일어 중남부 방언 기반에 아람어, 히브리어, 폴란드어 등 여러 언어가 혼합된 언어)’를 썼지만, 나중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열심히 익혀, 소통에 무리가 없을 만큼 원활히 구사했다. 유대 전통의 가족문화에서 자랐지만, 비유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인종세탁) 여러 남자들을 향해 노력을 기울였다. 안타깝게도 여러 다양한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마침내 43세에 이르렀을 때 그녀를 추종하는 연하의 독일인 남성과 결혼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보통의 독일 여성으로 동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적인 독일 여성처럼 산 게 아니었다. 여러 이유로 라헬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독일 여성이 아니라 유대계 독일 여성으로 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하든 ‘유대계’라는 사실은 지울 수 없었다. 지울 수 없음에도 ‘지우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였지만, 그게 어째서 문제인지, 또 그게 라헬 자신의 문제인지 사회의 문제인지, 심리적 문제인지 복합적 문제인지, 그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라헬의 삶에서 아렌트가 찾아낸 실존적 가치는 자기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일생의 흔들림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라헬은 게토와 동화 사이에서 평생 흔들렸음에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기자신이 왜 무엇이 되고 싶어했는지, 자기가 누구였는지 결국 알아냈다. 어쩌면 그녀가 평생 그렇게 헷갈렸기 때문에 정작 자기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헬의 경우는, 미운 오리 새끼와는 달리, 정해진 자신의 태생적 운명을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당신들과 비슷하게 살겠어’와 ‘당신들과 다르게 살겠어’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녀석의 운명은 아직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 ‘행복한 결말’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은 삶이었다. 왜냐면 녀석이 원래 백조였기 때문이다. 녀석이 ‘오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오리 생각을 그만두고, 백조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기만 하면 행복한 결말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라헬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남들과 같아질 수 없는데 같아질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만천하게 공개되면 안된다. 아니, 안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녀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공개되는 순간 그녀에게서 ‘행복한 결말’은 더욱더 멀어진다. 더 깊은 문제는 남들과 비슷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예컨대, 남다른 여성으로 동화할 것인가? 유력한 여성으로 동화할 것인가? 평균치 여성으로 동화할 것인가? 평균치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등등, 이를테면 동화의 기준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때로는 긍정했고, 때로는 부정했다. 라헬의 시대는 미래(독일 나치즘, 유럽 반유대주의의 시대)의 유대인 대학살극을 자아낼 ‘쓴 뿌리’가 바야흐로 유럽 전역에 자리잡아가던 때였다.
오리는 오리로 태어나고, 백조는 백조로 태어나며, 칠면조는 칠면조로 태어난다. 백인은 백인으로 태어나고 아시아 인종은 아시아 인종으로 태어나며, 흑인은 흑인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문젯거리가 되는 사회가 있다. 어떤 존재가 (자신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님에도) 천부적으로 장착하고 태어난 속성이 ‘있는 그대로’ 밝혀졌을 때 위험한 사회인가 안전한 사회인가, 거기에서 갈린다. 미운 오리 새끼는 천부적으로 장착하고 태어난 속성이 ‘있는 그대로’ 밝혀졌을 때 안전했다. 아니 안전 그 이상이다. 숭배받았으니까.
자, 이제, 동화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그리고 멀리 중세 혹은 18세기 유럽이나 20세기 나치 시대 독일에서 우리 시대로 돌아오자.
어떤 사람의 태어난 속성이 ‘있는 그대로’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는 그 사람을 위험한 지경으로 내모는가? 아니면 안전하게 품어주는가? 좀 극단적인 예가 될 것 같아 살짝 우려되지만 예를 들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과연 안전함을 느끼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덩치는 왜 그렇게 크며 생김새는 또 왜 그렇게 미우냐고 구박받는 미운 오리 새끼 ‘꼴’로 살고 있지 않을까? 넌 왜 알을 낳지 않느냐고 비난받는 미운 오리 새끼 ‘꼴’로 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