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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Nov 01. 2024

선녀와 나무꾼: 인생은 용서‘복붙’이라

세상 어느 동화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한국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은 특별히 흥미로운 줄거리를 자랑한다. 보기에 따라선 19금 줄거리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어린이들도 재미있게 꽤 즐기는 것 같다. 이 동화의 경우 워낙 버전이 여러 개라서 어떤 버전이 좋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와대 대통령기록관 사이트가 선정한 전래동화 줄거리 중에 <선녀와 나무꾼>을 발견했다. 거기 있는 줄거리가 딱히 ‘정본’이라기보다는 주요 줄거리를 환기할 수 있는 ‘대본(혹은 이본)’이 되어줄 수 있어, 머릿속 기억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대본을 참조하는 편이 나쁘지 않겠다는 정도의 마음으로 사이트 주소를 소개한다.


http://18children.president.pa.go.kr/mobile/our_space/fairy_tales.php?srh%5Bcategory%5D=07&srh%5Bpage%5D=20&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287



훔쳐본 사람 혹은 훔치는 사람 


<선녀와 나무꾼>은 나무꾼이 ‘장가를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서 시작된다. “옛날 옛적, 가난해서 장가를 못간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이 나무꾼이 하루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준다. 노루는 목숨을 구해준 보은의 의미로 선녀탕의 위치를 알려준다. 위치뿐 아니라 선녀의 날개옷을 숨기면, 날개옷을 잃은 바로 그 선녀와 혼인할 수 있다는 ‘꿀팁’까지 일러준다. 그뿐인가, 노루는 선녀가 아이 셋을 낳기 전엔 선녀에게 날개옷을 절대로 내어주면 안된다는 신신당부를 덧붙였다. 이때 독자들은, 마치 그 신신당부가 뭔가 잘못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갖는다.


아무튼 나무꾼은 자신의 본업인 나무를 하지 않고(으응?), 노루가 알려준 대로 선녀탕을 찾아가서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숨어서 훔쳐본다. 그러다가 나무꾼은 날개옷 한 벌을 숨긴다. 선녀들이 목욕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려 할 때 끝내 자기 날개옷을 찾지 못한 막내 선녀가 하릴없이 땅에 남는다. 나무꾼은 그 막내 선녀와 결혼한다. 나무꾼은 막내 선녀와 함께 살게 되었고, 아이 둘을 두게 되었다. 이 나무꾼은 ‘선녀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 사람이자 ‘선녀의 날개옷들 중 하나를’ 훔친 사람이다. 비록 단 1회로 그쳐서 다행스럽긴 하나, 이 나무꾼은 관음증자(voyeur)이자, 절도범(burglar)이다. 나무꾼과 막내 선녀의 혼인은 그의 범죄(?) 행위를 기반으로 한다.


계림북스 출간 도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과 노루의 당부를 망각한 사람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혼인이 막 성사되었는데, <선녀와 나무군>은 보통의 다른 동화들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happily ever after)”로 종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은 그러한 결말을 허락지 않는다. 나무꾼의 아내가 된 막내 선녀가 아이 둘을 낳은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하늘을 그리워했다는 서술로 나아간다.


나무꾼과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막내 선녀는 하늘을 그리워했다. 막내 선녀는 날개옷만 있다면 자신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막내 선녀는 나무꾼이 자신의 날개옷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무꾼이 시쳇말로 ‘불었기’ 때문이다. 막내 선녀가 ‘소환조사’를 했다든가 ‘압수수색’을 했다든가 했던 건 아닌 듯하다.


마침내 남편이 자신의 날개옷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게 된 막내 선녀는 남편에게 날개옷을 한 번만 보여달라며 사정사정하기에 이른다. 아내의 성화를 못 이긴, 혹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긴, 그도 아니면 노루의 신신당부를 까맣게 잊어버린 나무꾼은 결국 날개옷을 꺼내어 아내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막내 선녀는 날개옷을 입더니, 아이 둘을 한 팔에 한 명씩 끌어안고 하늘 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노루의 새로운 조언과 나무꾼의 새로운 실수 


졸지에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게 된 나무꾼은 다시금 노루를 찾아간다. 나무꾼에겐 달리 하소연할 데가 없었던 듯하다. 친구도 없고, 선생도 없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나무꾼과 비슷한 처지여서, 어머니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올 묘안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나무꾼은 선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노루에게 묻는다. 그러자 노루는 선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비법’을 들려준다. 노루는 나무꾼에게, 그때 그 사고(한 선녀의 날개옷이 도난당한 사건) 이후로 선녀들이 선녀탕에 내려와 목욕하는 게 아니라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하늘에서 목욕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물 긷는 두레박이 내려왔을 때 나무꾼이 그 두레박을 타고 있으면 두레박이 올려질 때 같이 올라가 하늘에 닿을 수 있게 된다는 것.


노루의 이 같은 행동은, 이전에 자기가 나무꾼에게 해주었던 신신당부를 이미 ‘어긴’ 나무꾼을 ‘용서해주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노루의 용서로 인하여 나무꾼은 새로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나무꾼은 노루가 상세히 일러준 대로 행동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는 과거 얼마 전까지 선녀이자 아내였던 여성과 자녀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였으면 또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이야기가 꺾인다.


심성이 착한 나무꾼은 땅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하여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몰래 하늘나라 말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오랜만에 아들과 재회한 어머니는 그냥 보내기 아쉬워, 따끈한 팥죽을 한 그릇 내왔다. 이야기는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진행된다. 나무꾼은 어머니가 주신 팥죽을 먹다가 말 잔등에 팥죽을 쏟았다. 말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나무꾼은 말에서 떨어졌고, 말은 하늘로 올라갔다.


말에서 떨어진 나무꾼은 선녀와 아이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포기한 채, 어머니와 함께 살며, 이제 노루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같이 하늘만 바라보다 세상을 떠났다. (‘나무 하러’ 다니기는 했겠지만.) 나무꾼은 그러다가 죽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닭으로 환생했다. 수탉으로 환생한 그는 새벽녘만 되면 하늘을 향하여 ‘꼬끼요오’ 하고 운다.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늘을 향해 하릴없이 울부짖기만 한다.



최고의 상륙작전 지휘관과 최악의 상륙작전의 지휘관은 동일인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맡은 일, 해야 하는 업무,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잘하고 싶어한다.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잘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 실수나 오류는 그리 많지 않아야 옳다. 그러나, 이 세상엔 실수나 오류가 자주 일어난다. 사람들이 잘하고 싶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할지라도 실수나 오류가 부지불식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수나 오류를 줄이려는 자율적 노력이 불필요한 건 아니지만, 잘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열정을 믿고,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실수나 오류를 완벽히 배제할 순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덩케르크 해변 철수작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때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는 무참히 실패한 적이 있었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지금도 ‘역사상 최악의 상륙작전’으로 일컬어진다. 만약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오류가 한평생의 경력을 좌우하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갈리폴리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처칠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지도자 그룹에 들어설 수 없었어야 했다. 수십 년 전 갈리폴리 전투의 실패를 두고서 “내가 왜 그랬을까” 평생 곱씹으며 죽을 때까지 기죽어 살았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우리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자신감있게 활약한 처칠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를 무찌르고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견인했던 처칠을 만날 수 없었으리라.


실수나 오류를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든지 자주 많이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유능, 유력한 정치인 처칠의 사례는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 여기에, 아렌트의 이론을 임팩트있게 덧붙여보겠다. 아렌트는, 인간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음(irreversibility)’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촉진되는 활동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용서(forgiveness)’다. 용서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나 잘못을 행한 사람을 ‘감정적으로 좋아하라’는 뜻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좋아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그 사람의 언행을 인정, 긍정할 수 있다. 그 인정, 긍정이 곧 용서다.



‘복수는 나의 것’ 아니고 ‘행위의 지속가능성’ 


그런 용서, 무척 어려울 것 같다고? 그리고 그런 용서는 우리 일상에서 드문 일이라고? 그렇지 않다. 그런 용서는 무척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 일상에서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우리가 사실 거의 매일 매순간 그런 용서를 일상적으로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상황에서라면 그럴 수 있지’ 하며 납득하는 마음을 떠올린다면, 상대를 감정적으로 굳이 좋아하거나 심정적으로 아끼지 않더라도 다소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구체적인 한 사람(의 행위)을 이미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내가 타인(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는가를 기억해보면, 내가 이미 여러 번 용서를 받았음 또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살아오는 동안 100% 올바른 일을 100% 올바르게, 실수나 오류 없이 완벽하게 행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 한, 우리는 살아오면서 최소한 한 번 이상 용서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 서로서로 용서를 주고받았기에 우리 80억 인류는 이 지구상에서 여러 다양한 행위를 지속가능하게 이어올 수 있었다.


‘혹시 망각 때문이었을걸’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을까? 음, 망각 역시 용서 활동의 다양한 범주 중 하나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 외치면서 절대로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잊지 않겠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의 실수나 오류를 잊어버렸을 것이며, 사실상 그리 잊히도록 놓아두었다는 ‘소극적 활동’ 자체가 용서일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행위의 지속가능성’을 선택한 행동일 수 있다.


우리는 실수한 녀석, 잘못한 사람, 불쾌한 인간을 꼭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A를 좋아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A를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우리는 A를 용서할 수 있다. 얼핏 ‘무덤덤’해 보이는 그 같은 용서가, 아렌트 정치이론체계가 이야기하는 용서다.



[쿠키 텍스트] 우리나라엔 노루가 제법 많이 산다. 한때 잠깐 멸종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지속적 보호정책 덕에 노루 개체수가 다시 늘어났다. 심지어 2000년대 들어서는, 제주도에 노루 개체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는 바람에 오히려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산 속에 사는 노루가 수시로 산 아래로 내려와 밭을 점령하다시피 해서, 어느새 골칫덩이가 된 것이다. 고라니도 골칫덩이 동물 중 하난데, 노루와 고라니는 심지어 비슷하게 생겼다. 이다지도 귀엽게 생긴 두 골칫덩이라니…!!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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