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중에서 <성냥팔이 소녀>는 ‘슬픈 줄거리’를 지닌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동화가 슬픈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주인공이 죽는다. 둘째, 동화 속 주요 갈등(가난,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 슬프다!” 하게 된다. 물론 콕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은근한 통쾌함,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있다.
이 동화를 가지고 ‘가난, MBTI, 감정과잉, 그리고 혁명’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성냥팔이 소녀> 주인공의 MBTI를 추론하려는 걸까?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하시겠지만, 아무튼, 먼저 <성냥팔이 소녀> 줄거리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눈 내리는 몹시 추운 어느 날, 저녁이 되어 길거리가 어두워졌다. 올해의 마지막 밤이다. 맨발에 맨머리인 불쌍한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이가 집을 나설 때는 신발 두 짝을 다 신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짝만 신고 있다. 왜냐? 제 발에 맞지 않는 어머니 신발을 신고 나왔다가, 길을 급히 건너던 중 헐렁거리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는 신발 한 짝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남자아이가 나타나더니, 여자아이의 나머지 한 짝 신발마저 가지고 도망치며 소리쳤다. “언젠가 내가 아이를 낳으면 이 신발을 ‘요람’으로 아주 요긴하게 쓸게!”
그때부터 여자아이는 꽁꽁 언 맨발로 지금 길을 걷는 중이다. 성냥을 팔기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한 개도 팔지 못했다.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정말 비참하게도!
집집마다 불빛이 새어나왔다. 창 아래를 지날 때마다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새해 전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멋진 저녁식사를 준비하거나, 이미 먹고 있었다.
두 채의 집이 모인 구석진 골목 어귀, 아이는 거기 쪼그리고 앉아서 두 발을 웅크렸다. 밤이 깊어지며 점점 더 추워졌지만, 아이는 집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이는 오늘 한 푼도 벌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틀림없이 두드려 팰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집에 가봐야 추운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아이의 집엔 지붕만 있을 뿐 벽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벽 틈새를 이것저것으로 쑤셔막긴 했지만, 언제나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와 휘휘 돌아다녔다.
여자아이의 손은 추위로 얼어붙었다. 작은 성냥 한 개비가 아이의 손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성냥 상자에서 성냥 하나를 꺼내 벽에 문질렀다. 손이 따뜻해질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성냥개비는 마치 작은 양초처럼 따뜻하고 밝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갑자기 그것이 기묘한 빛을 냈다. 아이는 자기가 빛나는 황동 손잡이와 황동 덮개가 있는 거대한 철제 난로 앞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두 발을 쭉 뻗었다. 그때였다. 불꽃이 꺼졌다. 철제 난로도 사라졌다. 아이의 손에는 다 타고 남은 성냥개비의 잔해만이 들려있었다.
여자아이는 담벼락에 두 번째 성냥을 그었다. 성냥개비가 밝게 타올랐다. 불빛이 벽에서 떨어지자 벽이 마치 얇은 베일처럼 투명해졌다. 아이는 집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눈처럼 하얀 천이 덮여있었다. 그 위에는 푸짐한 저녁 식사가 한 상 차려져있었다. 막 요리된 거위가 접시 위에 올려있었다. 아이가 거위 요리를 바라보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거위가 갑자기 접시에서 뛰어내려 꼬불꼬불 뒤뚱뒤뚱 걷더니, 바로 아이에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바로 그때 성냥불이 꺼졌다. 여자아이 앞에는 여전히 두껍고 차가운 벽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다시 성냥개비를 꺼내어 또 벽에 비볐다. 세 번째 성냥불이 타오르자 이제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앉아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 부유한 상인의 집 유리창문을 통해 훔쳐본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아름다운 트리였다.
수천 개의 양초가 푸른 나뭇가지에서 예쁘게 타올랐다. 인쇄소에만 있을 것 같은 색색의 그림들이 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여자아이는 두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성냥불이 또다시 꺼져버렸다. 그런데 이때까지 크리스마스 트리에 있던 불빛들이 흩어져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닌가. 여자아이의 눈에 그것들은 하늘의 별 같았다. 한참 바라보는데 그중 하나가 긴 불빛 꼬리를 만들며 땅으로 떨어졌다. 혜성이었다. “누군가 죽겠구나.”
여자아이는 조그맣게 말했다. 생전에 여자아이를 사랑해주었던 유일한 사람,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 말씀해주셨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여자아이는 벽에다 네 번째 성냥을 비볐다. 또 다시 주변이 밝아졌다. 불빛 속에서 할머니가 나타났다.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모습으로.
“할머니!”
할머니를 향해 아이가 소리쳤다. “나도 데려가줘! 이번에 성냥이 다 타서 꺼지면 할머니도 사라질 거잖아. 난 다 알아. 따뜻한 난로, 맛있게 구운 거위, 아름답고 멋진 큰 크리스마스 트리도 다 사라졌다구. 할머니는 사라지면 안돼.”
아이는 할머니를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서 남은 성냥개비들을 다 꺼냈다. 아주 빠르게 꺼냈다. 그 많은 성냥개비들에 불이 옮겨붙었다. 불빛이 너무 밝아, 여자아이 주위가 대낮보다 더 환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더욱더 밝고 빛난 모습으로 소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두 팔로 안아주었다. 할머니와 여자아이는 기쁨에 넘쳐, 함께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여자아이는 추위도 허기도 느끼지 않았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의 태양이 작고 불쌍한 여자아이의 몸 위로 떠올랐다. 여자아이의 몸은 뻣뻣했고 차가웠다. 온기 없는 손에 아직 쥐여있는 성냥개비들은 몽땅 새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이 아이는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싶었구나.”
길을 걷다 여자아이의 주검을 발견한 사람들이 나직히 읊조렸다. 쯧쯧, 혀를 차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아이가 세상 떠나기 직전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는지, 그리고 아이가 얼마나 행복하게, 얼마나 밝고 힘찬 새해를 할머니와 함께 맞이했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안데르센은 이 동화를 통해 진정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불쌍한 여자아이 한 명이 어느 추운 겨울날 성냥개비들을 모조리 소진하며 몸을 따뜻하게 하려 하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것뿐일까? 아니면, 불쌍한 여자아이를 불쌍하게 여길 줄 아는 공감 충만한 사람이 되자, 그런 류의 도덕적 교훈일까?
요즘 자주 목격하게 되는 현상인데 MBTI를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융(Carl Jung) 심리학이론을 독학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두 소설가 모녀가 의기투합하여 제작한 심리검사다.
MBTI는 여덟 가지 성격지표의 조합을 통해 사람들의 성격에 대하여 유형화, 도식화한다. 이건 ABO 혈액형 방식보다 유형의 갯수가 많아서, 얼핏 볼 때 조금 정교해 보이는 인상이 있다. 그렇지만, 사실상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유형화된 집단에 집어넣어 파악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보면 ABO 방식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유형의 개수가 많을 뿐이다.
MBTI 추종자(?)들 사이에서 “너, T지?”라는 표현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 냉정하고 냉담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거의 대체한다. 그런데, 우리 사는 세상이 하도 팍팍해서 그런가, 우리는 T(Thinking)보다 F(Feeling)가 더 좋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MBTI에서 막상 T형으로 나타난 분들은 그것에 대하여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MBTI 결과의 신뢰도 및 타당도에 대해서는 ‘할말하않’)
T보다 F가 ‘다정해서’ 더 좋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있을 수 있다. T보다 F를 굉장히 강조하는 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시대는 어떤 시대이며,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아마도 각박한 시대, 각자도생의 사회, ‘혁명’의 조짐이 몽글거리는 시대, 사회가 아닐까? 프랑스혁명 전야처럼 말이다.
프랑스혁명기에 프랑스 사람들이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은 긴 창 끝에 잘린 사람의 머리를 꽂고 행진하는 장면이다. 어떤 쪽으로든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렌트는 프랑스혁명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품은 감정, 동시에 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고 짙은 공감과 동정(연민)이 내뿜어졌다고 분석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프랑스혁명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레미제라블> 또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프랑스혁명기를 겪어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에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 그리고 연민의 감정 등이 뒤얽혀있다.
흥미롭게도 아렌트는 프랑스혁명을 앞에서 주도한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형태의 ‘감정의 무제한성’을 발견했다. 이는 감정이 말 그대로 무제한으로 발산되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 감정에 압도되어, 마침내 감정이 추상화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감정이 추상화되면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개개인 사람들이 진짜로 겪는 다양한 구체적 상황과 형편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오히려 둔감해질 수 있다. 감정이 풍부하고 충만하게 올라온 상태일 때, 사람은 그 감정의 기승전결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혁명기에 사람들이 그랬다. 감정이 몹시 고조된 나머지, 귀족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적’으로 낙인찍었고, 낙인찍힌 자들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죽였다. 죽인 다음에는 창 끝에 그들의 머리를 꽂고 노래하며 행진했다. 그뿐 아니다. 폭압적 절대군주라기보다는 아내의 나라로 튀려 했던 ‘겁쟁이 루이16세’가 전격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될 때 ‘우~’하는 함성에 자기 목소리를 보탰다. 누군가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명분과 기치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즉결처형도 서슴지 않았다. 감정이 압도하는 혼돈, 격정이 일반화된 혼란이 사람들의 삶의 기운과 마음과 몸을 한쪽으로만 몰아붙이던 그때, 마침내 전쟁영웅이자 폭압적인 황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야 말았다.
아렌트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이 시작될 무렵 고통받는 사람들의 ‘필요(먹고사는 것, 경제적)’는 몹시 격렬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게 아니라, 사실은 전(前)정치적인 것이었다.
사람은 경제적으로 살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살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산다는 것은 ‘먹고사는 것을 중시한다’는 것을 물론 포함한다. 나아가 경제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유재산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사는 것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경제적으로만 사는 삶’도 나올 수 있다. 즉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의 구별에 따르면 ‘To Have’에 집중하는 삶 말이다. 문제는 감정이 격해지면 아주 손쉽게 극단으로 달려가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이 혹시 ‘To Be’일까? 아렌트에 따르면 그렇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삶’이란 내가 나로서 인간답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는 삶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엔 ‘경제적 삶’이 본질적으로 포함된다. 신체의 유지, 보전이 없으면 어차피 정치적 삶은 불가능하다. 단,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적 삶은 남들이 못 보는 어떤 것을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에 대해 나의 언어로 말하며, 나아가 남들 앞에서 나의 몸을 직접 움직여 보이는 것이다(action).
이쯤 해서, <성냥팔이 소녀>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아이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 돌이켜보자. 그 아이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을 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물론 그게 (어떤 평론가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목숨이 희미해져가는 동안 보게 되는 일련의 ‘환상’이었다 해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할머니를 만났을 때 성냥개비를 다 소비하면서까지 자기의 관점, 소망을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여자아이의 마지막 순간에 ‘정치적 삶’이라는 명찰을 붙이는 게 가능하다. 아니, 아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다시 말해 숨이 붙어있는 순간순간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으로 정치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감정에 압도되어 ‘To Have’라는 극단으로 달려가지만 않는다면….
[쿠키 텍스트] 흥미롭게도 우리가 잘 아는 혁명이라는 용어 즉 레볼루션(revolution), 혁명(革命)이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회복’ ‘복고’의 의미가 ‘도장 찍힌 흔적처럼’ 남아있다. 급격한 변화, 본질적 개혁,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revolution의 어원은 ‘천체 궤도의 합법칙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혁명(革命)이란 글자 뜻 또한 ‘천명의 주기적 변화’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