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사법부가 행한 재판의 선고 결과에 대한 설왕설래, 갑론을박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가 되는 어떤 재판에 관련된 개인 판사의 실력과 양심은 의심받고, 관련하여 권력자들 사이 모종의 뒷거래나 상호 약점 잡아 조종하기 등에 대한 음모론이 횡행한다. 우리나라에서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와 법으로 판단하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이미 어느 정도 만연되어있는 것 같다. 재판을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있다. (어느어느 정당 지지를 떠나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에 대한 전반적 불신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망부석 재판>은 웃기는 재판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웃기는 재판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판단과 멋진 판사’를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판단과 멋진 판사는 ‘법지식’이나 ‘법기술’에 투철하게 진행되는 일종의 법률사무와는 거의 무관하다. <망부석 재판>이라는 유쾌한 동화 나라에서, 좋은 판단과 멋진 판사는 칸트의 비판철학과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가리키는 ‘공통감각(Common Sense)’과 대단히 밀접히 연결되어있다. 칸트&아렌트가 이야기하는 ‘공통감각’은 ‘상식’이나 ‘여론’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한 사회가 공유하는 ‘상식’ 혹은 특정 사안에 대한 대중적 의견이 집약된 ‘여론’ 같은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먼저 동화 줄거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우리나라 전래동화 이야기 줄거리를 가져왔던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이번에도 <망부석 재판>의 줄거리를 가져왔다. 한편 제목이 <망주석 재판>인 동화책도 있다. 참고로, 망부석(望夫石)은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석상을 가리키고, 망주석(望柱石)은 무덤가에 세운 석상을 의미한다. 재료는 ‘돌’로 동일하지만, 그 돌에 붙어있는 의미가 상이하다.
어느 날 비단장수가 비단 짐을 짊어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아이고 어깨야, 다리야 삭신이 쑤시네” 하면서 비단장수는 주저앉고 말았다. 비단장수는 망부석 앞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비단장수가 잠에서 깨어보니 비단 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너무 오래 잤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내 비단이 다 어디 간 거야! 나의 밥줄인데 말이야!’
비단장수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훌륭한 재판관으로 이름난 고을 원님을 찾아가 사정을 고했다. 원님은 비단장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변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망부석을 잡아다 추궁하면 범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서 그 망부석을 체포해 오너라!”
망부석이 체포되었고, 기상천외한 망부석 재판이 열린다는 광고문이 동네방네 나붙었다. 재판 당일, 호기심에 가득찬 참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원님은 문지기 사령에게 명령하여,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람들만 들여보내라고 했다. 이거 차별 아닐까? 실은 여기에서부터 이미 재판이 시작된 것.
“이 망부석! 범인이 누군지 바른대로 말하거라!”
원님이 망부석에게 고래고래 호통을 치는 것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물론 망부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심문을 이어갔다. 원님은 “네가 도둑놈과 짜고서 비단을 훔친 게 사실이렸다? 어서 바른대로 말하여라”라고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재판 참관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처음엔 킥킥, 숨죽여 웃었지만 나중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리게 되었다. 한 사람이 와하하, 웃자 주변 사람들이 다같이 와하하, 웃어댔다. 그러자 원님이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로 명령했다.
“아니, 고을 수령이 진지하게 재판하는데 어째서 웃는 사람들이 있는고!? 여봐라. 지금 웃은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옥에 가두어라!”
재판 참관하러 왔다가 느닷없이 옥에 갇힐 운명에 놓인 사람들은 원님에게 한 번만 용서해주십사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애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원님의 표정이 풀리더니, “3일 안에 비단 한 필씩 바치면 풀어주겠노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자기 옥에 갇힐 뻔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빠르게 달려나가 제각기 비단 한 필씩 구입해서 앞서거니뒤서거니 원님께 가져왔다.
원님은 그들이 가져온 비단을 한데 모아서 비단장수에게 보여주었다. 비단장수가 한필 한필 들여다보더니, 그 비단은 자신이 도둑맞은 비단과 똑같은 것이라고 원님에게 보고했다. 품질도 색상도 심지어 수량도 자신이 망부석 아래서 잠들 때 가지고 있었던 비단과 동일했다.
원님이 비단을 바친 사람들을 마당에 다시 불러모아 누구한테서 비단을 샀는지 물었다. 그때 금방 나가서 비단을 구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지녔던(!), 다시 말해 옷을 잘 갖춰 입고 재판정에 나타났을 만큼 재력을 갖췄던(!) 그 사람들은 약간 겁에 질려서 이구동성으로 산 너머 사는 한 비단장수에게서 급히 샀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원님은 당장 그 산 너머에 사는 비단장수를 붙잡아오라,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비단장수는 도둑맞은 비단을 모조리 되찾을 수 있었고, 원님은 진범을 체포할 수 있었다.
<망부석 재판>에서 진범을 향한 재판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럼 이때까지의 재판은 무엇이었나? 가짜 재판이었다. 가짜 재판에서 원님의 행위는 보편과 상식 선에서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공통감각’을 적절히 활용한 지혜로운 판단행위였다.
아렌트에 따르면 원님뿐 아니라 재판 참관객들 모두가 ‘판단’이라는 행위를 실행했다. 원님은 재판 참관객들이 모두 자기대로 판단할 거라고 예측했기에 돌덩어리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행위를 일부러 연기했다.
칸트와 아렌트에 따르면, 판단이 근거로 하는 ‘공통감각’은 ‘소통가능성’을 뜻한다. 판단은 ‘맞다/틀리다’를 판정하는 게 아니다. 판단은 반드시 드높은 철학적, 추상적 차원의 진리를 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판단은 말하자면 공동체적이고 대중적인 소통 활동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특정한 판단이 공동체 안에서 아무리 봐도 ‘소통불가’한 내용으로 가득차있다면 그 판단 내용은 다시금 충분히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단,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판단이 포퓰리즘을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판단이든 공동체 안에서 소통이 될 수 있는 수준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바꿔 말해, 판단이 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서는 안된다. 판단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공개되어야 하고, 비밀스럽게 감춰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판단은 일부 개인들의 사적 이익에 봉사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모든 비판적 이성(들)을 향해 공개돼있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그 판단에 대하여 수긍할 수 있어야 그 판단은 좋은 (‘옳은’이 아님) 판단이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지도교수 카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리는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칸트 정치철학 강의> 중에서).”
흔히 우리는 법을 공부해 법을 다루는 사람을 두고 ‘우리 일반사람들보다 더 높은 법률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좋은 판단을 내리겠지’ 하며 막연히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법률지식에 대한 일방적 숭배의 태도에서 나온 기대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판검사에 대한 환상, 판타지 같은 게 없지 않다. “공부 열심히 해서 판검사 되어라”는 우리 사회에서 ‘덕담’의 하나로 자리잡은 역사가 길다. 심지어 가족 중 누군가 한 명이 판검사라면 그 가족 구성원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로스쿨이 등장하기 전 ‘사법고시생’은 다만 사법고시 수험생일 뿐인데도 금지옥엽 수준으로 대우받았다. 사법고시생을 뒷받침하는 큰누나, 여동생, 홀어머니 등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신들의 삶을 갈아넣었고, 재수삼수를 고집하는 사법고시생들은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려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칸트&아렌트 정치철학의 뒤를 잇는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판단은 공부에 대한 열심, 공부로 쌓아올린 실력, 시험 잘 치르는 재능과 무관하다. 판단은 법률지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판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통감각에서 나온다. 소통가능성에서 나온다. 혼자 고시원에 들어가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 사람이 판단을 잘하는 게 아니다. 로스쿨에서 과제물을 잘 제출하고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한 사람이 판단을 잘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법률지식은 쓸모가 없는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의 여러 판단이 어떠한 공통감각에 토대해있는지 살펴보려 할 때 쓰인다. 판단을 소통하려 할 때 쓰인다. 예컨대 낙태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연결하는 법률이 있는 나라의 공통감각과 어느 경우에도 임신된 태아는 낳아야 한다는 법률조항이 있는 나라의 공통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좋은 판단이 산출되고, 멋진 판사가 더 많이 배출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공부 방법을 바꿔야 할까? 법관이 되는 절차를 엄격하게 바꿔야 할까? 칸트&아렌트의 판단이론에 따르면 그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의 공통감각에 대하여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또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
[쿠키 텍스트] 재미로 한 번 상상해보자. 원님이 망부석을 재판할 때 “네 이놈”하고 불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망부석을 “네 이놈”하고 부르면 안된다. 왜냐? 망부석이 망부석(望夫石)이기 때문이다. 망부석 전설에서 망부석의 ‘재료(?)’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박제상의 ‘아내’다. 사람을 ‘재료’로 표현해서 죄송하다.
어떻든! 남편을 기다리는 돌, 그러니까 동성애 커플이 아닌 이상 망부석의 성별(sex or gender)은 ‘여성’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하나 더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멋진 회화 작품 <망부석(‘망주석’ 아님, 그림 안의 글자 확인)>에서 망부석의 성별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하다는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배우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반드시 여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작품을 잘 들여다보면 큰 돌사람 옆에 조그마한 돌사람 한 덩어리가 더 붙어있는 게 보인다. 겸재는, 얘도 딸인지 아들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혹시 의도적으로?!) 그려놓았다. 겸재의 ‘젠더초월’ 휴머니즘이려나?????
지금 당장, 자신의 공통감각에 비추어 (돌의 젠더에 대하여) 직접 판단을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