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나라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영원토록 울려 퍼지는 나라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 그러면 좋을 것 같다.
동화의 나라에서 살면 좋을까? 행복할까? 만족스러울까? 동화의 나라가 지금 현실에 쪄든 나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나라니까 안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할 터. 찰나의 상상 속에서 ‘동화의 나라에 한 번쯤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는 마음이 들긴 한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우리 인생 최종 목적지로 제법 바람직한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영원히 행복하게”의 구체적 장면이 얼른 연상되지 않아 어리둥절케 된다. 근데 이 와중에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구절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불행하다”가 떠오르는 건 뭐지?
그건 그렇고, 피터팬의 ‘네버랜드,’ 앨리스의 ‘원더랜드,’ 마법의 세계 ‘나니아’ 혹은 ‘오즈,’ 피리부는 사나이가 휘~ 돌아나간 ‘하멜른,’ 한물 간 동물들이 음악 밴드를 결성한 곳 ‘브레멘’ 등은 이름이 분명한 ‘동화의 나라(Fairyland)’들이다. 하지만 ‘옛날 옛적 어느 나라’라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스리슬쩍 얘기되며 지나가는 나라들이 훨씬 많다. 세상 모든 나라를 두루 싸잡아 일컫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아무 나라도 가리키지 않는 것 같아, 오묘하고 아리송하다. 헌데 오묘하고 아리송해서 사랑스럽다. 명료하게, 명확하게, 명석하게, 현실세계가 강요하는 단정적 분명함을 슬쩍 우회하는 것 같은 여유가 느껴진다. 이런 게 ‘동화적’ 자유로움이려나.
동화의 나라는 환상세계, 가상세계 같은 곳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모험이나 모함, 마법이나 언약, 행운이나 불행은 직접 경험이 아니고 간접 경험이다. 간접 경험이어서 괜찮거나 아쉽지만, 과몰입을 방지하니 괜찮다. 그리고 동화에는 재미도 있고 교훈도 있다. 재미 쪽이 두드러지는 동화도 있고, 교훈 쪽에 비중을 두는 동화도 있다. 흔히 어른이 되면 동화로부터 멀어지게 된다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어느 경우에나 그렇듯, 어른도 어른 나름이다.
아렌트(Hannah Arendt)는 정치사상가, 정치철학자다. 유대계 독일 여성이며, 1906년에 태어나 1975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렌트? 됐고…,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는걸, 이라고 읊조릴 독자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독자들이 아렌트라는 저자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독서 취향이 천양지차인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나아가 복된 일이다. 80억 인구의 독서취향이 한 가지로 단일했다면 오히려 끔찍하다. 똑같은 책만 읽고 똑같은 책만 소비하는 나라에서 내가 산다면? 아이쿠야, 끔찍해, 한탄이 절로 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악의 평범성’이나 ‘인간의 조건’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아렌트 이름 옆에 덧붙이고자 한다. 그러면 방금 전, 이름이나 전공분야, 생몰연대 정도만 거론했을 땐 살짝 시큰둥했던 독자들 가운데서도 ‘아하!’ 하는 탄성이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들어 아렌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독자들이 있다.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우리나라로만 국한하더라도 다만 ‘있다’ 정도가 아니라 ‘비교적 많다’에 가깝다. 당장 아렌트 저서의 한국어 번역본들이 대부분 아주 빠르게 초판 완판을 달성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컨대 아렌트는 번역가들에게 ‘언어 변환’ 작업과정에서 고심 및 고난을 안겨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인세도 두둑이 챙겨주는 정치사상가다.
잠깐 여담. 번역하며 애쓴 보람이 반드시 물질적 보상으로 돌아와야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국 소설가 닉 혼비(Nick Hornby)가 전제한 것처럼 “하나의 시장에서 일하고 있고 사람들이 실제로 읽거나 보고 싶어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번역작가라면 ‘잘 팔리는 책을 집필한 외국인 작가’가 고맙고 반가울 것이다. 그 사람의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도 물론 고맙고 반갑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나라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읽히고 또 읽혀, 명실공히 두루 읽히는 종류의 책을 예시하라면 단연코 ‘동화’다. 동화는 읽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들려지기도 하고 말해지기도 한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는 ≪그림 형제 동화집≫과 ≪안데르센 동화집≫에 각각 수록되어있지만, 책을 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들조차 주인공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줄거리와 갈등상황과 결말에 대해 한 말씀 이상 발언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청개구리 이야기> 같은 우리나라 전래동화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동화들은 우리 삶 속에 훅, 들어와있다. 살면서 한 편 이상 동화 작품을 경험한다. 동화는 우리 주변에 머물며 여러 가지 유익을 준다. 우선 재미가 있다. 시청후미촉 오감을 건드릴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한다. 때로는 가슴이 웅장해지거나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뿐인가 동화는 사회화, 예의범절, 그리고 교훈의 반복재생 텍스트로 기능할 때가 많다. 요즘 창작되는 새 동화들을 포함해 모든 동화들은 외국어 학습용으로도 훌륭히 활용된다.
가만 보면 전래동화 혹은 고전동화같이 오래된 동화들은 문학비평이나 아동교육 차원에서의 독서만을 고집하는 ‘닫힌’ 텍스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열린’ 텍스트다. 설정이 달라지거나 결말이 뒤바뀌는 사례도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오리지날 텍스트뿐 아니라 수많은 수정본 텍스트가 돌아다닌다. ‘디즈니’ 같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제목만 같은 거 아니냐 싶을 만큼 과감하게 각색(개작? 재창작?)한다.
동화의 나라 속 인물들은 인간성의 원형(prototype), 전형(stereotype) 등을 내포한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정치’로 개념정의한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대하여서는 동화가 아예 문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형제 동화, 안데르센 동화, 그리고 한국 전래동화 이야기와 아렌트의 목소리가 즐겁게 어울려 노는 현상을 기록하는 작업을, 바야흐로 시작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