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살아야 학생도 산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민망하지만 지난 6년 나는 내 삶의 모든 부분을 교사로서 사는 것에 온전히 바쳤다. 쓸 수 있는 체력, 시간을 모두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잘 가르칠까. 어떻게 이끌어줄까. 교사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실천에 모든 삶을 쏟아 부었다. 그 당시에도 늘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지나고 보니 교사로서 내가 온전히 교육이라는 것에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교사로서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사실 가장 밑바탕에 내가 학교에서 교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안도감과 안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했던 학교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일과 교육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나와 우리 학교의 교육 구성원이 '옳다'고 믿는 방향의 교육활동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모든 지지와 지원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 곳이었기에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함'이란, 서글프지만 내가 정상적인 교육활동의 범위내에서는 누군가에게 아동학대로 고발당하지 않으리라는 '안전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교육적 방향의 범위내에서는 어떤 교육활동을 하더라도 학부모나 관리자에 의해 나의 교사로서의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으리라는 '안전함'도 포함한다.
우리학교는 교사로서의 철학과 열정을 까다롭게 요구하는 학교였기에 일하는 것이 쉬운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교육을 위해 교사가 온전히 집중하며 아이들을 위해 살 수 있던 곳이었다. 물론 교사로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아이들을 위해 몰입하고, 교사로서 성장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기에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짚고 싶은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들이 과연 교사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 삶을 가꾸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안전하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는 교사가 안전하게 교육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렇게 된지도 이미 꽤 오래 되었다.
학부모나 학생의 기분이 상하면 언제든 아동학대로 고발당해 직무에서 배제되고 직업을 잃을 수 있는 환경, 그렇기에 관리자들은 다른 것보다도 보신을 최우선으로 하며 교사들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환경, 책임은 늘어나면서도 권한은 줄어드는 환경. 그 모든 것들이 교사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교사의 권리가 줄어들고 책임은 늘어나는 와중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교사의 자율성이 줄어들며, 교육의 상상력은 줄어들고 의욕도 줄어든다.
젊은 교사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200만원 어치 일만 하자',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이야기는 웃어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네 새끼도 아닌데 왜 열심히 하냐'는 이야기도 웃어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언론에 여러번 나왔던 전주 모 초등학교의 괴물 학부모 두어명이 교사들을 망가트리고 나아가 학교를 망가트리고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는 것은 정도가 지나쳐서 그렇지 이미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꽤나 일상적인 일이다. 현장체험학습 거부를 외치는 일부 교사들의 외침도 책임감 없는 배짱부리기에서 나오는 모습도 아니다. 모두 학교가 더 이상 교사들에게 안전한 일터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나라는 제도의 미비함을 꽤 오랜시간동안 그리고 꽤 큰 간극을 순수한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메워왔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교사들의 과도하다싶을 정도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대기에는 이미 선을 한참 넘었다. 정상적인 교육활동과 훈육에도 언제든 아동학대라는 이름으로 공격받을 수 있고, 교육적 자율성을 침해받을 수 있는 일터에서 교사들은 열심히 살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지난 몇년간 힘들디 힘든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내 삶을 갈아 넣으면서도 행복했던 것은 우리 학교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전함이라는 안도감과 그것의 바탕 위에 나는 아이들과 그리고 학부모들과도 교육 공동체로서 신뢰를 나눌 수 있었고 아이들의 삶을 책임지는 또다른 부모로서 살 수 있었다.
"야 너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교사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니?" 누군가가 물었던 적이 있다.
학교는 아이들 없이는 의미가 없는 기관이다. 다만, 아이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피고 함께 삶을 가꾸는 교사도 똑같이 소중하다. 교사가 없이는 아이들도 없기 때문이다. 교사가 살지 못하는 학교에서는 아이들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살 수 있어야 아이들도 살 수 있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