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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따뜻한 학교를 꿈꾸며

삶이란 품앗이니까 주는 것에 인색해지지 말자

by j kim

학교 내 공동체와 연대는 학교 내부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동료들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몇 번 있다. 이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교사로서 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의 유대지만 그와 더불어 학교라는 조직의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사는지도 중요하다.


동료들이 이런 점이 별로고 부족하고 이래서 저래서 따위의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내가 어떤 동료가 되어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주변 사람에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 다정한 사람도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다. 다만, 나는 그보다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손내밀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내가 이전에 받았던 도움과 지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다.


남한산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에 '마음을 내어주다'는 표현이 있는데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기를 남에게 준다는 것에 가깝다. 여유가 있어 남는 내것을 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을 들여 내 시간과 노력을 정성들여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준다는 이야기다. 헌신에 가까운 표현이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까 궁금했는데 그곳에 살다보니 그 말이 결국 나에게 와닿았다. 마음을 내어주고 내것을 먼저 남에게 줘야지만 그 공동체가 더 따뜻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게다가 그 마음 내어줌은 마치 릴레이처럼 이어져 내리사랑으로 계속해서 전해지는 것이더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은 결국 내가 먼저 줘야지만 나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있던 구성원들은 그것을 먼저 깨닫고 자기 것을 나에게 준 것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 나의 동료들과 구성원들에게 힘닿는대로 주며 살아왔다. 그리고 결국 그 이상으로 돌려 받았다고 느낀다. 혹여나 내가 준 대상에게 그것을 돌려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을 것 같다. 나의 내어줌이 돌고 돌아 언젠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믿으며 살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준만큼 돌려받지 못한다 하면 바보같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공동체라는 것은 결국은 내가 준 것이 언젠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그 돌고돎이 지금껏 인간들이 살아온 원동력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학교에서 되먹지 못한 동료를 만나 고생했던 세월이 있다. 인격에 대한 모독과 성희롱 등. 동료라고 부를, 교사라고 부를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수백번을 다짐했다. 다만 그때는 내가 어렸고 어떤 동료가 될지에 대해 고민조차 깊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트라우마들 덕분이라면 학교라는 공동체 내에서의 연대와 내어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간절한 사람들이 있을지 더 잘 안다.


교사는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교실과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 이십여명의 미성숙한 아이들을 홀로 '성장'이라는 길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관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교사는 독립적인 만큼 외롭다. 그렇기에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동료로서 관계 맺는 동료를 어떤 동료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마음 내어줌의 따뜻함을 경험해온 내가 새로 옮긴 학교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선생님들에게 먼저 가서 '혹시 도와드릴 것 없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다'면 먼저 말을 거는 것, 집안의 조사를 겪은 말 한 번 나누지 않았던 선생님에게 먼저 찾아가 괜찮으시냐 여쭤보는 것, 다른 교사의 일이라 내가 해야할 일이 아님에도 먼저 다가가 '도와드릴테니 같이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 보결을 들어갔던 반의 선생님에게 별일 없으시냐, 보결 제가 다 해드릴테니 걱정말고 일찍 들어가셔서 일 보시라고 먼저 이야기하고 같이 걱정해드리는 것, 가장 도움이 필요해 보였던 초임 후배교사들에게 먼저 도움주고 책 선물과 편지를 선물했던 것, 남이 해야할 일도 내가 할 수 있다면 대신해주는 것, 동료가 직접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대신 말 꺼내서 도움 받을 수 있도록 나선 것 등 그런 오지랖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남에게 주어 이 공동체를 조금 더 따뜻한 연대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모든 이들에게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못된다. 평소에 모든 사람들에게 잘 웃지도 않고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따뜻함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마음 내어줌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것들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대로 주면서 살려고 한다.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직접 움직여 남들에게 본이 되는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 그 '본'들이 쌓여 학교의 문화를 바꾸고 학교라는 공간이 연대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학교라는 조직에서 크게 같을 것이 없어 보이는 교사들끼리도 사실은 교사라는, 같은 학교의 교사라는 가장 큰 동질성을 공유한다. 이보다 소중한 동질성을 지닌 동료들이 있겠는가?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동료들에 대해 조금 더 따뜻하게 손내밀며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명제를 말만으로 남기기보다는 나는 실천하며 사는 동료가 되고자 한다.


2023년에 겪었던 한 후배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나는 여지껏 죄책감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학교내 연대와 학교 공동체의 소중함에 대해 부르짖으며 실천하고 살고 싶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커다란 무언가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적어도 내가 속한 작은 '학교'라는 조직내에서 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료로서 다 하며 살아야겠다는 사명을 안고 살아간다. 아무도 손내밀지 않던, 차가움을 넘어 따가움이 가득하던 학교에서 살아본 나는 연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고 싶다. 그래서 줄 수 있는 만큼은 주면서 살고 싶다. 그게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도 믿는다. 그리고 설령 돌아오지 않으면 또 어떠냐.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남 줄 수 있는 건 주면서 사는게 남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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